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시린 마음을 치유하는 법

한현숙 2024. 1. 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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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오빠가 떠오른 날, 결국 가족의 힘으로 보듬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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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숙 기자]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의 끝자락, 휘영청 보름달이 서늘함을 덜어 낸다. 크고 밝은 달이 세상을 품어 내듯 온유한 얼굴을 드러내니 놓칠세라 걸음을 멈추고, 방아질하는 토끼라도 있을까 시선을 올려 본다. 달무리 주변으로 원을 여러 겹 그리다 달빛에 흠뻑 젖어드니 다정한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모여든다.

엄마, 오빠 그리고 아버지. 나의 그리운 원가족이 달빛에 모두 모여 은은한 시간을 누리기를 바랐다. 너무나 일찍 내 곁을 떠난 나의 사람들, 오빠, 아버지, 엄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의 불행한 인생은 나의 가슴 한복판을 차지하고 때마다 목울대를 달군다. 속상하고 아린 마음이 저려온다.

지금의 나라면 초라한 오빠 얼굴을 화사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초췌한 엄마 가슴을 따스하게 품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좌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아버지에게도 따끔한 조언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후회로 가득한 가슴 서느런 나의 가족들이다.

오빠는 그곳에서 인자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리광부리기를,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좋은 머리로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멈춰 선 서른세 살을 뛰어넘어 나와 함께 나이 들어 늙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는 지금처럼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 가난과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에서 철부지 소녀로 언제나 웃음 짓기를, 누군가를 책임지는 무거운 어깨를 내려놓고 투정도 부리고 치대기도 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무엇보다 건강한 아들과 야무진 딸의 모습을 오래오래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뾰족한 마음 털어내기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그곳에서 참회의 눈물로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무릎 꿇기를, 긍정적인 밝은 웃음으로 더 이상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지 않기를, 상처를 씻어내어 자신을 치유하고, 엄마와 오빠의 다정한 손을 놓지 않기를 다소 뾰족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 유난히 그들이 보고파질 때면 하염없는 마음을 산책 길에 풀어내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다. 후회와 질책만으로는 버틸 수 없기에 과거의 작은 애정 하나, 실오라기 같은 웃음 하나 놓치지 않고 소환하여 달빛에 녹여 본다. 불행 속에서도 웃음이 있었음을, 가난 속에서도 풍족한 것이 있었음을 찾아내, 버틸 용기로 만드는 일종의 자기 최면치료다.

어둠과 불행으로 얼룩진 과거의 얼굴에 그늘을 거둬들이고 건강한 웃음으로 채우면 진짜 마음이 가벼워지는, 가족의 얼굴이 어제보다 점점 밝은 얼굴로 그려지는 신기한 효과도 있다.

학업을 마저 마치지 못한 아쉬움에 늘 방황하던 오빠, 가정폭력이 드물지 않았던 미친 시대라 치부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손찌검을 휘두르던, 경제적 무능력자 아버지, 남편으로 인한 시련과 남편을 대신한 희생을 고스란히 감수한 탓에 몸도 마음도 스러져간 우리 엄마, 이들을 지켜보며 가슴 쓰리게 아파하던 막내인 나는 결국 혼자 남아 그 처연한 얼굴을 때때로 떠올리며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고 이제는 늙어간다.

원가족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은 세상! 나를 지탱하는 힘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밖에. 남편과 세 딸... 그리고 시댁 어른까지. 지금의 웃음으로 과거의 어둠을 덮어 가듯, 든든함과 따스함 속에서 원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여유를 마련할 수 있음이 다행 중 천만다행이다.
 
 세 딸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때때로 사랑과 감사함으로 우리를 영글게 한다. 지난 6월 남편 회갑을 맞이하며 딸들이 보낸 선물 상자의 메시지
ⓒ 한현숙
 

내가 가진 단점의 근원이 모두 그때로부터 기인했다면, 까칠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원가족 생활에게서 찾아야 한다면, 포용력과 참을성을 키울 시간을 그 시절 가난으로 인한 불행 때문에 놓친 거라면, 아니 우리 원가족이 좀 더 무탈했다면 보다 나은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사무치면 나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의 의미를 새긴다.

공장을 다니며 나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신 엄마, 눈보라 속에서 기타를 사 들고 나에게 건네주던 오빠, 시장 골목 어귀에서 나의 겨울 점퍼를 고르던 아버지, 고단함 속에서도 분명 반짝이는 햇살 같은 순간이 있었음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 내 마음의 안정을 구축하는 데 차곡차곡 쌓아 왔다.

맛난 것을 먹을 때, 엄마가 생각나 속이 아려오면 극빈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준 엄마의 최선과 희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겨냈다. 여행길에 멋진 풍경을 볼 때, 오빠가 생각나 미안함이 사무치면 나의 자존감을 키우고 인정 욕구를 채워준 오빠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 떠올리려 애썼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부끄러움과 애증이 차오르면, 그래도 어느 한순간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던 그 눈길만 부각하기로 하였다. 오로지 나의 평정과 안정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지금 달빛 아래 그때만큼 가난하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죄책감으로 마디 굵어진 엄마의 손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시린 일인지 내 딸들은 잘 모르는 듯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건강한 아버지 품에서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딸들의 일상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하고 싶은 일을 꿈꿀 수 있고, 부모님과 의논할 수 있고, 지친 마음을 함께 할 자매가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서로가 기쁘게, 든든하게, 미덥게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 가족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사회도 하루하루 발전하고, 공평해지고, 흔들려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리라. 감사할수록 감사한 일이 생긴다는 말을 믿고 따를 수 있으니 진정 또 감사함 뿐이리라.

원가족으로 인한 아픔을 결국 가족의 힘으로 치유하며, 상처가 잘 아물어 새살이 돋기를 바란다. 흉터는 남을지라도 고통과 불행을 떠올리는 일이 점점 옅어지기를,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여 마주해 본다. 보름달은 나를  따라와 여전히 한 치 앞을 비추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달빛 안에서 웃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송고 후 개인 블로그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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