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통령' 윤 대통령이 꼭 보아야 할, '문재인의 마음'
[서부원 기자]
▲ 2007년 5월 3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문재인 비서실장과 정국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그는 평생 지역주의 타파와 권위주의 청산에 헌신하며, '바보 노무현'이라 별명을 얻었다. 대통령이 돼서는 불행했던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며,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과 남북 경제협력 활성화를 염원하며 10·4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 결정을 두고 지지자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우직하게 그의 길을 갔다.
하지만 '구시대의 막내'를 자처한 노무현 정부의 숱한 업적들은 단 하나의 사실에 묻혀 빛이 바래고 말았다. 당시 야당 이명박 후보에게 정권을 내주었던 것. 그것도 역대 최고의 득표 차이로 무릎을 꿇었고, 그는 신권력과 그에 굴종한 보수언론에 의해 무참히 조리돌림당했다. 그의 업적은 통째로 부정당했고, 그를 지지했던 정치 세력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최근 출간된 책 <대통령의 마음>을 읽는 내내 노무현을 떠올렸다. 책의 주인공은 문재인 전 대통령인데도 그랬다.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노무현으로 바꿔 읽어도 어색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구체적인 정책은 달랐을지언정 당시의 정치 상황과 언론 환경,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이르기까지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에서다.
이 책을 통해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되는 역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계승을 자임했고, 윤석열 정부는 인사와 정책 등 모든 면에서 이명박 정부 '시즌 2'라고 불렸다. 이명박 정부 당시에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 정부와는 무조건 반대로)'라는 단어가 유행했듯, 지금은 'ABM(Anything But Moon, 문재인 정부와는 무조건 반대로)'이 횡행한다.
이명박 정부가 전임 노무현 정부의 업적을 지워냈듯, 지금 윤석열 정부는 전임 문재인 정부의 그것을 흠집 내는 데 혈안이 된 모습이다. 보수언론조차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데도 무소불위 검찰의 칼을 손에 쥐고 막무가내식 행보를 보인다. 법을 제 손안의 공깃돌로 여기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무기로만 사용하고 있다.
놀라운 건, 현 정부의 막장 행태가 도를 넘어설수록 문재인 정부가 남긴 업적들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시나브로 잊히고 있다는 점이다. "퇴임 후 잊힌 삶을 살겠다"던 그의 바람이 통한 걸까. '잘못되면 모든 게 문재인 탓'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만 빼곤, 불과 2년 만에 그의 임기 동안 이뤄냈던 성과들은 언론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알다시피,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은 물론, 북핵 문제 해결의 토대를 마련한 전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기 후반기를 코로나19에 대응해야 했던 악조건 속에서도 재정 지출을 최소화하며 세계에서 가장 대처를 잘한 국가로 손꼽히기도 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추진하며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고, 무상보육제도를 도입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최초로 코스피 3000을 돌파한 것도 문재인 정부 시절이다.
▲ <대통령의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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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그랬듯, 문재인 정부의 업적들도 순식간에 부정당했다. 단지 하루아침에 야당 정치인으로 변모한 윤석열 후보에게 정권을 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도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기수와 관행을 깨고 무리해서 임명한 검찰총장 출신이었으니, 제 발등을 찍은 셈이 됐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죄과치곤 가혹하다.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면, 김건희 여사를 비롯한 윤석열 대통령 가족과 그의 최측근이라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그리고 그들의 공동의 적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름만 언론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허구한 날 그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느라 문재인은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한편으론 다행스럽긴 하다. 퇴임 직후부터 온갖 능욕을 견뎌야 했던 노무현의 전철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열 살배기 아이들도 정치 평론을 즐긴다는 정치 과잉의 시대에, 전임 정부의 자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이 너무나 반가웠던 이유다.
제목은 <대통령의 마음>으로 달았지만, 기실 대통령이 임기 중 남긴 말과 글을 그러모은 뒤 저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책이다. 당시 추진된 정책들이 어떻게 입안되고 최종 결정되었는지 관찰자 시점에서 꼼꼼하게 정리한 것이어서 역사적 기록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저자 최우규는 20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과 연설기획비서관으로 일했다.
최종 결정권자로서 끝까지 모든 걸 책임지려고 했던 '본심'과 국민을 향해 마지막 한 톨까지 꼭꼭 씹어 전하려 했던 '합심',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한결같았던 '진심'을 느끼게 해주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한때 그를 모셨던 비서관이 '주군'을 비난하는 글을 쓸 리 없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있진 않다. 기자 출신답게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듯 대통령의 고민을 담박하게 기술하고 있다. 마치 몰래 녹음한 녹취록을 듣는 느낌이다. 하루를 분초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청와대 직원들의 숨 막히는 일상을 소개하는 건 덤이다.
책에 소개된 대통령의 모습은 별로 낯설지 않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들이다. 담론보다 구체적인 정책을 요구하고 격의 없는 토론을 중시하며 언어 사용에 엄격함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누구라도 '고구마 같은' 문재인을 떠올리게 된다.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엿보는 재미 또한 제법 쏠쏠하다.
정작 눈여겨봐야 할 건 따로 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사실 중에는 일부 언론에 의해 '단장취의(斷章取義)' 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단순한 오보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왜곡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들 가짜 뉴스에 현혹됐던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한편으론, 그들이 언론자유 보장 운운하는 게 가증스럽기도 하다.
▲ 2019년 11월 8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이 인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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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이 책은 '이니(문재인의 애칭)'의 팬들에게 필독서가 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폭정에 지쳐 '구관이 명관'이라며 전임 정부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도 반가운 선물일 수 있겠다. 그해 겨울 촛불 혁명을 반추하며, 각자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 두꺼운 글씨체로 편집된 대통령의 발언들을 이어 붙이면 5년간의 역사가 된다.
가망 없어 보이긴 해도, 이 책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다.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 갔을지언정 대통령실의 업무는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정면교사든 반면교사든 이 책에는 참고할 만한 대목이 정말 많다. 외교부터 내치까지, 참모진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는 방안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읽기에 몹시 불편할 수는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 성공 사례에서는 세계 잼버리 파행 사태와 부산 엑스포 유치 참패를 떠올리게 될 테고, 문 대통령의 의전 간소화 요구를 소개하는 부분에선 윤 대통령의 잦은 해외 순방을 대조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예산과 보안 문제를 들어 광화문 집무실 공약을 파기한 것 역시 윤 대통령의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확연히 대비된다.
또, 동남아 국가들과의 교역을 확대하려는 신남방 정책은 현 정부의 미일 편중 외교와 배치되는 모양새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따박따박' 반박하며 반성을 촉구했던 모습은 현 정부의 대일 저자세 외교를 떠올리게 한다. 사전 결론과 받아쓰기를 금지한 계급장 뗀 토론 문화는 검사동일체 원칙을 고수하는 듯한 용산 대통령실과는 상극처럼 느껴진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윤 대통령이 '어통령(어쩌다 된 대통령)'이라는 건 세상이 모두 아는 바다. 대신 서울대 법대를 나온 검찰총장 출신으로서 뛰어난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직 임기가 3년도 넘게 남았다. 성찰하고 포용하고 집중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5년의 역사를 꼼꼼히 메모해가며 5시간 만에 독파했다. 책을 덮고 복습 삼아 메모장을 들춰볼 차례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선의가 역사를 바꾼다'는 문 대통령의 말씀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페이지를 넘기니, 시비 걸 듯 내 소감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정치는 선의로만 되는 게 아닌 듯하다'라고.
사족. 솔직히 이 책을 삐딱한 시선으로 읽었다. 끝내 '사람 좋은' 문 대통령의 매력에 끌리고 말았지만, 듣고 싶고 알고 싶었던 게 빠져 있어 많이 서운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꼽히는 부동산 문제와 인사 문제에 관한 내용은 아예 없다. '옥에 티'다. 저자도 못내 찜찜했던지, '아는 바가 적어서'라고 맨 뒤에 그 이유를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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