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책 쓰는 건 더 큰 명함 갖는 것

2024. 1. 13.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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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준 작가


신유박해로 귀양을 간 정약용은 유배 18년 동안 5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처음엔 억울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 ‘흠흠신서’를 썼고 관리들의 타락상을 목격한 뒤엔 공무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다룬 책 ‘목민심서’를 썼는데 그 분량이 자그마치 48권이나 되었다. 정인보는 정약용을 가리켜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의 천재 정약용은 그 오랜 불안과 정치적 불행 속에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책을 썼던 걸까.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인데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다. 사람들은 왜 아직도 책을 쓰고 싶어 할까. 책을 팔아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서일까. 예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책 인세만으로도 집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독서인구가 줄기도 했지만 절대 인구 자체가 감소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책을 내는 사람들도 판매에 큰 기대가 없다.

2018년에 냈던 에세이 ‘잘 돼가? 무엇이든’의 개정판을 최근에 낸 이경미 감독은 책을 내고 여러 반응을 살피다가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 없어”라고 인터뷰어에게 투덜댔을 정도다. 문지혁의 소설 ‘중급 한국어’에서 첫 책을 낸 주인공은 “나는 책을 내면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거나 아니면 기분이라도 좋아질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셋 다 아니었다는 얘기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들어가 책을 쓰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 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쓴다,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 쓴다, 꾸준히 공부하기 위해서 쓴다 등등 많은 이유가 나와 있었다. 요컨대 책을 내는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뭔가를 끊임없이 공부하는(알아가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자신의 직업이나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강연을 해보는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거나 터득한 것들을 설명하듯이 이야기하다 보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자동으로 알게 되고 더 공부해야 할 사항도 깨닫게 된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바로 그런 말이다. 가르치면서 학생도 선생도 같이 성장한다는 뜻인데 내 생각엔 책을 쓰는 것이야말로 교학상장의 궁극이다.

한 권의 책을 쓰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통찰을 한 번은 세세하게 훑어야 하고 그걸 다시 정리해 한 자 한 자 써서 책이라는 매체에 펼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세상을 더욱 깊이 읽고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꾸준히 쌓다 보면 어느덧 작가가 된다. 꼬리에 신경을 안 썼는데도 꼬리가 꼬리를 무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책 쓰기 워크숍을 5년째 하고 있다. 출판기획자인 아내가 먼저 제안한 이 워크숍을 함께 진행하면서 나는 인권위원회 조사관이 작가로 변신하는 것을 목격했고 여성 개그맨이 작가로, 술 박사가 작가로, 지방의회 보좌관이 작가로…. 자신의 직업을 유지한 채 ‘작가님’이라는 또 하나의 신분을 획득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이제는 서점에서 저자 사인을 하거나 지자체나 문화센터에서 특강을 하는 그들이 워크숍에 처음 와서 했던 질문은 언제나 똑같았다. 저는 글쓰기에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책을 쓸 수 있을까요?

나는 자신이 쓴 책이야말로 그 사람을 다르게 소개해 주는 좀 큰 크기의 명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꼭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아도 좋다. 세상에는 책을 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당신이 쓴 책이 서점 매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오랜만에 마주친 예전 직장 동료는 내게 “나는 당신이 객쩍은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는 우스운 사람인 줄 알았지. 근데 벌써 책을 몇 권이나 썼더라?”라는 모욕적인 감탄을 했고 나는 껄껄 웃으며 “그러게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물론 그 사람이 내 책을 읽어보고 “뭐, 읽어보니 별 내용도 없더구먼. 작가라고 잘난 척하더니”라고 혹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 책을 쓴 경우를 보지 못했다. 손에 쥔 명함이 한 장뿐이라는 얘기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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