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 공 날려보냈는데 “굿 샷”이라고? [정현권의 감성골프]
혼자 핸드폰을 보다가 동반자가 클럽으로 공을 때리는 순간 터져 나온 찬사였다. 공은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더니 숲 속 OB구역으로 날아갔다.
플레이어는 물론 동반자들과 캐디마저 황당한 표정이었다. 딴청부리다가 영혼 없는 멘트를 습관적으로 날린 것이다.
골프장에선 빈말이 난무한다. 악의라기보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동반자에 대한 배려 차원도 있다. 간혹 구찌(입방아)로도 사용된다.
필자는 입문 후 3년까지 정말 골프에 재주가 있는 줄 알았다. 늘 나를 골프 신동이라고 치켜세우던 선배가 다른 초보 2명에게도 똑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서야 빈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스코어가 엉망인 초보에게 싫증과 열등감을 주지 않고 격려하는 빈말이어서 기분 나쁘지는 않다. 골프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연습 좀 하라는 충고로 알아들어야 한다.
“빈 스윙은 프로야.” 필드에서 모든 골퍼가 한번쯤은 들어본 말이다. 너무 자학하지 말라며 위로하는 빈말이다. 짓궂은 농담이기도 하다.
모처럼 만난 동반자가 요즘 허리가 좋지 않다거나 연습한 지 오래됐다고 말하면 엄살이다. 밑밥을 깔아놓고 상대로 하여금 방심을 유도하거나 자신의 부진에 대한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 놓는다.
막상 경기에 들어가 연속 파를 잡아내면서 기량을 펼치면 뭔가 싶어 내가 무너진다. 연습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연습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제 잠 못 잤어”, “나 진짜 환자야”, “골프채 잡은 지 오래야” 같은 빈말에 속지 말자.
블라인드 홀에서 공을 애매하게 날렸는데 캐디가 “가봐야 알겠는데요”라고 말하면 대부분 패널티나 OB구역에 날아갔다는 의미이다. 캐디 처지에서 단정적으로 “OB 났어요!”라고 말하면 플레이어 기분을 망친다. 혹시나 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걸지 않는 게 좋다.
잠정구 대신 빨리 경기를 진행하려는 의도도 있고 만에 하나라도 공이 살았다면 미안하기 때문이다. 공이 나갔다고 생각하는데 캐디가 가봐야 알겠다고 말하면 희망을 가지게 돼 싫지는 않다.
은근히 실력을 과시하면서 캐디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케이스다. 물론 경기 진행에만 관심 있거나 초보 캐디가 제대로 그린 정보를 공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티 샷 OB에다 토핑(Topping)까지 이어지면 “오늘 왜 이러지”라며 한숨을 토한다. 과연 오늘만 그럴까.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 같 은 건 나만의 느낌일까. 빈말이다.
경험상 티 샷 OB땐 “이상하다”, 세컨드 샷 뒤땅엔 “오늘 왜 이러지”, 서드 샷 토핑엔 “어~”라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그린에서 4퍼트를 하면 급기야 눈을 감고 침묵한다.
파5 롱 홀에서 우드로 두번째 샷을 잘 날리면 “투 온 그린일 것 같은데요”라는 캐디 말도 기분 좋은 빈말이다. 어차피 그린에 공이 올라가지 않아도 잘 쳤다는 찬사이니까.
어떤 때는 캐디가 “클럽 보고 프로 선수인 줄 알았어요”라고 말한다. 농담으로 던지는 빈말이다. 동반자가 한술 더 뜬다. “복장은 아예 PGA급이야.”
선망의 눈길을 보내던 캐디가 티 샷 OB를 낸 후배에게 흔쾌히 멀리건을 주었다. 두번째 티 샷한 공은 패널티 구역에 빠지고 말았다. 캐디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며 다시 멀리건을 제공했다.
세번째 홀에서마저 공을 이상한 데로 날려보내자 캐디 입에서 바로 튀어나온 말. “그냥 가시죠”. 캐디가 귓속말로 필자에게 진짜 프로선수인줄 알았다고 했다. 빈말은 골프에 흥미를 더하는 감미료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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