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없는 환자 위해 29년 동안 한 자리에서 ‘의안’ 만들었어요"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관상 전문가가 아니기에 눈만 보고 사람 성격을 맞추진 못하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선한 눈’이 어떤 눈인지 정도는 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선한 눈이란 눈빛이 매섭지 않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에 악의가 없는, 그래서 눈만 마주쳐도 마음의 빗장이 조금은 허물어지는 그런 눈이다. 지난 연말에 만난 세브란스안과병원 백승운 의안사의 눈이 딱 그랬다. 선한 눈을 가진 그의 직업은 의안(義眼)을 만드는 의안사다. 그는 안과병원 한편에 자리 잡은 의안실에서 매일 환자 한 명 한 명을 위해 의안, 즉 인공 눈을 제작한다. 그렇게 의안을 만들고 정비하고 연구한지 29년이 흘렀다. 그에게 의안 제작은 단순히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의안은 불의의 사고나 무안구증, 소안구증, 녹내장, 망막모세포종과 같은 병으로 인해 안구를 적출한 환자들이 사용하는 인공 눈이다. 환자들은 심미적인 이유뿐 아니라 시력이 남아 있는 반대쪽 눈의 건강을 위해서도 의안을 착용한다. 백승운 의안사는 “세브란스안과병원 의안실의 경우 질병으로 오는 환자가 절반, 사고로 오는 환자가 절반이다”며 “남녀 비율은 4대 6이고 러시아, 중국 등 외국인 환자도 5%정도 된다. 대부분 한쪽 안구를 적출한 환자들이다”고 말했다.
의안을 착용하는 환자 중엔 어린 아이들도 있다. 선천적으로 작은 눈을 갖고 태어났거나 망막모세포종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 한쪽 눈을 적출해야 하는 경우다. 20여 년 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거나 들어갈 때 쯤 의안을 맞췄지만, 지금은 신생아도 의사 판단 하에 생후 28일 후부터 의안을 착용할 수 있다. 백 의안사는 “아무래도 어린 환자일수록 제작이 까다롭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설명해도 협조가 잘 안 돼서 달래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며 “지금은 한결 수월해졌다. 아이들이 원하는 걸 잘 들어주고, 부모들에게 의안을 착용하고 나가는 길에 선물을 사주라고 당부할 때도 있다”고 했다.
인공 눈이지만 육안으로는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실제 눈과 흡사하다. 환자의 반대쪽 눈을 보면서 눈동자 색·크기는 물론, 혈관까지 그대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안구를 적출해도 눈 주변 근육들이 잘 보존되면 움직임, 시선 역시 자연스럽다. 백승운 의안사는 “의안 제작은 100% 맞춤”이라며 “간혹 환자에게 가장 맞게 제작해도 환자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주변 가족에게도 의견을 들어보는 걸 권한다. 의안은 환자가 보는 것이 아닌, 타인에게 보이는 것을 고려해 만들기 때문이다”고 했다.
안구 적출 수술을 받은 환자는 안구가 있던 자리에 보형물을 채워 넣는다. 이 수술을 받으면 눈동자 대신 빨간 결막이 보이는데, 그 위에 의안을 제작해 착용한다. 의안 제작을 위해 의안실을 찾으면 의안사가 앞에 앉은 환자의 반대 쪽 눈을 보며 플라스틱 인공 눈을 만든다. 치과에서 레진으로 치아 모양을 만드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틀, 즉 흰자위가 완성되면 눈동자와 혈관을 그려 넣고, 다시 한 번 특수 용액을 씌운다. 인공눈은 고분자 플라스틱 성분이며, 눈동자는 오일 컬러(oil color, 유용 염료)로 그린다. 재료는 모두 독성검사를 통과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 GMP(의약품 제조·품질 관리 기준) 인증을 획득한 후에 사용할 수 있다.
제작 시간은 의안사마다 다르다. 백승운 의안사의 경우 ‘1일 1제작’하고 있다. 하루 8시간에 걸쳐 환자 한 명만을 위한 의안을 만든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백 의안사는 “하나도 간신히 만든다. 의안 하나가 120만원 정도인데 환자가 원하는대로 잘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웃음)”라며 “환자는 최대한 의안 티가 안 나게, 예쁘게 만들기 바라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안전과 편리함이 우선이다. 예쁘게 만들어도 착용했을 때 아프면 찡그린 표정을 짓게 된다”고 했다.
의안을 잘 만든 후에는 주기적으로 정비도 필요하다. 예컨대 착용 후 변색, 균열, 눈꺼풀 처짐과 같은 문제가 생기면 수정이나 교체가 필요하다. 이런 정비 작업도 의안사의 일이다. 백승운 의안사는 의안 제작·정비 외에 기능성 의안 연구·개발, GMP 인증을 위한 품질 관리 업무도 함께 맡고 있다.
백승운 의안사의 공식 직함은 의안사가 아닌 세브란스안과병원 안성형파트 의안담당 ‘검안사’다. 숨은 사연이 있다. 2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과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5년 2월 세브란스병원 안과(당시엔 안과병원이 아닌 안과였다)에 안과 검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검안사로 입사했다. 그러나 1년 만에 생각지도 못한 의안 제작 일을 맡게 됐다. 병원에서 의안 제작을 담당할 인력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의안 제작 담당자를 염두에 두고 그를 채용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백승운 의안사만 이 사실을 몰랐다. 그는 “병원에서 ‘당신이 의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채용했다’고 하더라. 의안이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들어봤는데”라며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며 의안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의안을 만들어온 지 벌써 29년째다. 그동안 약 2만명의 환자를 만나 의안을 제작해주고 정비해줬다. 어린 시절 그가 만들어준 의안을 착용한 환자가 성인이 돼서 찾아올 때도 있다. 백승운 의안사는 “환자 한 명 한 명이 다 기억난다. 얼굴 보면 이름까지 바로 생각난다”며 “8시간을 마주 앉아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이전엔 환자 스스로 의안을 부끄러워하고 의안을 착용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환자들이 의안 착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의안을 제작할 때도 적극적으로 요구사항을 이야기한다. 백 의안사는 “의안 착용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진작할 걸’이라고 이야기한다”며 “착용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쓰면 된다. 의안 착용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갖고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백승운 의안사는 의안 제작·수리와 함께 변색의안(체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 의안)이나 3D프린터 프로그램 등 여러 연구·개발에도 매진하고 있다. 29년 전 처음 의안 제작을 배울 때처럼 힘닿는 데까지 환자에게 필요한 걸 개발하고, 그게 안 되면 다음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을 때까지라도 연구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최대한 개발해보고, 안 되면 문서로 남겨 다음 의안사에게 인수인계해 언젠가는 환자들을 위한 기술이 개발됐으면 한다”며 “의안사는 의사처럼 시력을 찾아주진 못한다. 그저 환자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려던 찰나 백승운 의안사가 환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의안도 의치와 똑같다. 매일 빼서 관리해야 한다”며 “의안을 잘 만드는 것보다 잘 관리해서 좋은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잘 관리하면 정비를 받거나 안성형수술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의안을 착용하지 않은 반대쪽 눈을 관리하는 데도 신경을 써달라”고 했다.
1. 백승운 의안사의 방에는 안과 책만큼 치과 책도 많다. 처음 의안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치과에서 레진을 이용해 치아 모양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많이 연구했기 때문이다.
2. 의안실을 구경하던 중 작업대 한 켠에 놓인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필름 사진 색이 언뜻 봐도 20년은 더 돼 보였다. 백승운 의안사 말로는 ‘이렇게라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두 아들이 어렸을 때 의안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라 한창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래서…”라고 조용히 말했다. 사진 속 장소는 그가 일하는 세브란스병원 뒤 안산 봉수대다.
3. 그는 사람 눈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의도치 않게 의안을 착용한 사람들을 알아볼까봐서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백 의안사는 “예전에 우연히 맞지 않는 의안을 착용한 사람을 보고 ‘도움을 주겠다’며 찾아오라고 했는데 버럭 화를 내더라. 숨기고 싶은데 왜 알아보냐는 거다”며 “돌이켜보니 내가 거만했다. 환자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진 기다려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4. 백승운 의안사가 그린 눈동자를 보다가 문득 그의 그림 실력이 궁금해졌다. “다른 건 못 그린다. 눈동자만 그릴 줄 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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