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윤정훈 2024. 1. 1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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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클립 대표이자 <공예+디자인> 편집장 정성갑이 포착한 여러 삶의 방식들.
©unsplash

집을 좋아한다. 내게 맞는 집에 살고 싶어 아파트와 빌라, 한옥으로 이사도 많이 다녔다. 서울에 협소 주택을 짓고, 양평에는 오두막을 지어 주말이면 쉬러 간다. 집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집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쉬고, 놀고, 충전하는 이곳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 또 있을까. 친구나 지인의 집에 초대도 많이 받는다. 내가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지만,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초대하는 사람이나 초대받는 사람 모두 흐뭇하고 행복하다.

2주 전에 도예가 변승훈과 갤러리스트 양정원 부부의 집에 다녀왔다. 언제 만나 맛있는 것 먹자며 오랫동안 기약하다 성사된 초대였다.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마을은 도예가 김정옥 작가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이 터를 마련해 들어온 곳이다. 1년 전 느지막한 저녁에 갔는데 주말 낮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너른 들판과 낮은 초목이 평화롭게 자리 잡은 1000여 평의 땅. 진입로에는 23년 전 이곳에 처음 터를 잡으면서 심은 감나무와 매화나무, 소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양정원 대표의 오랜 컬렉션인, 크고 잘생긴 돌과 바다에서 부표로 사용하던 녹색 유리구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도자기 파편을 외벽에 붙이고 돌을 금속판처럼 얇게 켜(예전에는 이런 재료와 기술도 있었다) 지붕에 올린 단층집이 보였다. 분위기에 취해 감탄사를 연발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 바빴다. 고양된 기분을 한껏 띄운 것은 식탁인데, 도예가의 밥상이니 아름다움이 오죽할까. 덤덤하고 힘 있는 분청 도자에 쌈 채소를 담고, 널찍한 도자 볼에 셀러리를 올리고, 와인 잔마저 분청 잔으로 세팅된 모습은 삶의 장면장면이 예술이 되는 ‘리빙 아트’의 증표였다.

두 사람이 고기를 굽고 요리하는 사이에 편하게 둘러본 내부도 근사했다. 거실에는 찻그릇과 달항아리 같은 대표작으로 힘 있게 진열하고, 침실에는 작은 피아노와 오래된 가구로 단출하게 꾸몄다. 도자 파편을 벽면과 바닥에 붙이고, 맞춤한 크기의 우묵돌을 한쪽에 들이고, 그 위에 동그란 조명을 단 화장실은 분위기가 종교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화장실과 욕실은 오롯이 혼자 머물며 이런저런 찌꺼기를 비워내는 ‘성소’나 다름없다고 . “공간이 바뀌는 건 나의 우주, 나의 부모가 바뀌는 것”이라는 철학자 같은 말도 기억에 남는다. 점심에 시작된 담소와 식사는 초저녁까지 이어졌다. 커피와 과일까지 푸짐하게 먹었는데도 음식이 계속 들어갔다. 가까운 카페로 마실도 다녀왔다. 오가는 길에 느릿느릿 게으른 동네 고양이도 보며 가을볕이 두텁게 내린 들녘도 구경했다. “내 사업을 잘하려면 나부터 그만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조언도 묵직하게 와닿았다. 친구들의 집과 작업실에 가는 것이 좋은 이유는 이런 공간과 말을 통해 삶의 방식과 지혜를 배우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이를 깨닫고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의 집과 공방은 그 다양한 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저마다의 방식과 열심으로 일상을 윤기 나게 가꿔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와 조바심으로 날카로웠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잠시나마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삶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기억에 남는 집이 많다. 건축가 구만재 소장의 작업실은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지트다. 값비싼 조명과 가구도 많지만 그 사이사이 직접 만든 도자기(개인 교습을 통해 도자기를 배운 지 10년도 넘었다)와 일본·프랑스 여행에서 데려온 화첩과 유리잔이 무심하게 놓여 있다. 하이라이트는 작업현장에서 남은 콘크리트 블록에 철제 앵글을 툭 꽂고, 그 옆으로 선반과 거울을 단 거치대. 선물로 받아 내 갤러리에도 한 점 두었는데, 일종의 스페셜 에디션이라 종종 사람들에게서 팔면 안 되냐는 질문을 받는다. 매킨토시 오디오와 큼지막한 사각 스피커에서 파블라 카살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부터 피아졸라의 탱고까지 여러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시간이 나면 대나무 소쿠리 등에 먹물을 갈아 안팎으로 입힌다. 이유는 간단하다. 검은색의 차분함이 좋아서. 한국의 남극 세종기지까지 설계한 이 남자는 사진에도 진심이어서 남극으로 출장 갈 때는 큼지막한 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고 그것을 엮은 사진첩까지 갖고 있다.

마이알레 우경미·우현미 대표의 집은 믹스매치의 정수를 보여준다. 낮이면 빛이 한가득 쏟아지는 거실 바닥 전체에 러그와 카펫을 깔고 그 위에 쿠션과 사이드 테이블을 ‘던져놓듯’ 연출한 솜씨라니. 이미 1990년대부터 해외여행과 출장을 수시로 다니던 이들은 바야흐로 힘 하나 안 들이고 공간을 갖고 노는 경지를 보여준다. 삼청동에 있는 공예 전문 갤러리 월(WOL) 조성림 대표의 한남동 집도 멋스럽다. 거실 천장고가 압도적으로 높은데, 한쪽에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진열장이 있어 틈날 때마다 컬렉션한 공예품을 오브제처럼 올려둔다. 부암동 산자락에 있는 건축가 최욱과 설치미술가 지니 서 부부의 집은 서울에서 가장 멋진 집이라 할 수 있다. 높고 낮은 지세를 따라 본채와 작업실, 서재, 명상의 방이 흩어져 있는데 하나의 작은 마을이라 해도 될 만큼 근사하고 아름답다.

어떤 장소는 놀라움과 자극, 영감을 준다. 하지만 친구의 집이나 작업실이 주는 기운은 이런 뾰족함과는 거리가 있다. 많은 시간이 통과한 강가의 풍경처럼 둥글고 완만하게 와닿는다. 그 안에서 나도 그들처럼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샘물처럼 차오른다. 이를테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나 부지런히 집을 가꾸는 성실한 태도 같은 것들이다. 남의 집 구경만큼 재미난 것도 없다지만 그건 수박 겉 핥기 식의 피상적 구경이고 진정한 가치는 여러 삶의 방식을 기분 좋게 경험한다는 데 있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시간은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관계 맺기가 아닐는지. 우리는 그 환대의 시간을 통해 세상 사는 재미와 방법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이자 〈공예+디자인〉 편집장이다. 토크 프로그램 〈건축가의 집〉 기획자로도 활동하며 저서로 〈집을 쫓는 모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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