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2024. 1. 1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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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세 쌍둥이가 태어났다. 한 생명은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는 중이다.
10월 25일, 서안지구 나블루스의 작은 병원 소아과에서 치료 중인 두 명의 신생아.

지난 10월 7일, 시작은 팔레스타인 무장 집단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이었다. 이스라엘이 반격하며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이 진행 중인 지금, 그 잔혹한 현장에서도 고귀한 생명들이 탄생하고 있다. 그리고 10월 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나블루스(Nablus)에 자리한 작은 병원에서 여섯 명의 산모는 열여섯 명의 작은 생명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들은 출산 이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가 연결되는 에레즈 검문소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볼 수도 없게 됐다.

마순 아시랍(Massoun Ashrab), 리나 살라딘(Lina Salahaddin) 박사와 알라 아불랍크(Alaa Abulabqe) 소아과 간호사. 나블루스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여성 의료진이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쌍둥이. 둘 다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환자들에게도 검문소를 통과하는 일은 매우 고역이었습니다. 아픈 사람 중 많은 수가 검문소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스라엘 점령군이 그들의 병원 행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죠. 많은 여성이 검문소에서 아기를 낳아요. 검문소에 대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2020년에 발표된 팔레스타인 여성 인권보고서에 담긴 증언이다. 가자지구에서 서안지구 나블루스의 병원까지 6시간을 이동해 12년의 노력 끝에 쌍둥이를 품에 안은 서른다섯 살의 한 산모는 기습 공격 당일 남편이 있는 가자지구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병원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녀는 출산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출산 이후 즉시 가자지구로 돌아간 또 다른 산모는 잠시 병원에 두고 온 쌍둥이와 재회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진의 일상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나블루스 병원의 팔레스타인 여성 의료진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보다 자신이 돌보는 산모와 조산아들의 회복을 우선시하며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 같은 엄마이자, 여성으로서 힘을 모으는 것. 이것이 그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유다. 이 지역에 고립된 여성들은 병원 옆 작은 아파트에 함께 머물며 뉴스를 통해 상황을 살피고, 가자지구에 있는 가족에게 별일 없길 바라며 매일 기도한다.

태어난 지 3개월 된 쌍둥이.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잠시 가자지구로 돌아간 엄마 사브린(Sabrine)은 아직도 아이들을 만나러 오지 못하고 있다.
3개월 된 쌍둥이 중 한 명이 이만 간호사의 품에 안겨 있다.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지난 12월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남부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던 국제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 역시 갑작스러운 대피령으로 가자지구 진료소 지원 활동을 11월 30일자로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이후 가자지구 보건 체계와 의료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사망자의 70% 이상이 여성과 아동이다. 그러나 가자지구로 반입되는 식량과 물, 의약품 등 구호물자는 수요를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상태. 나블루스 병원의 산모와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 위험한 날을 보내고 있다. 평화를 무너뜨리는 전쟁의 참상이 여성과 어린아이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시점. 새 생명을 맞이하기 위해, 가족을 돌보기 위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국경과 장벽을 넘은 그들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부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평안하기를, 그 내디딤에 평화와 화해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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