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처럼, 당신도 리브랜딩하라!"

편성준 2024. 1. 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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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상에 똑같은 도시는 없다'는 <도시x리브랜딩>

[편성준 기자]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제작·감독한 영화 <더 레슬러>에는 왕년엔 인기 레슬러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랜디 로빈슨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술집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얼터너티브락을 저주하며 "주다스 프리스트나 아이언 메이든 때가 좋았지. 계집애 같은 놈들이 나타나서 다 망쳐버렸어"라고 투덜대는 주연 배우 미키 루크의 모습은 성형과 알코올 중독으로 오랜 슬럼프를 겪었던 그의 실제 인생과 겹쳐져 안쓰러우면서도 사실감이 넘쳤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광부들이 모두 떠나버린 강원도의 폐광지역 정선과 사북을 떠올렸다. 화석연료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는 활기찼을 탄광지역은 관광버스 창밖으로도 메마른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황무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정선이 1998년 강원랜드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했다. 한국인이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 덕분에 정선은 한국의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면서 다른 도시와는 절대적 차별성을 갖게 된 것이다. 쇠락했던 도시가 리브랜딩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철강산업의 쇠퇴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스페인 북부의 작은 소도시 빌바오. 이 작은 철강산업 도시를 세계 제일의 관광지로, 창조력이 평가절하되던 한 건축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건축물 '구겐하임 빌바오(Guggenheim Bilbao)'. 2023_0325
ⓒ 김진석
 
강원랜드 같은 예는 스페인에도 있다. 헤밍웨이가 '부유하지만 무덥고 추한 관광도시'라고 묘사했던 빌바오는 제철·조선 등으로 한때 스페인에서 사장 부유했던 도시였으나, 국제적인 산업지형의 변화에 따라 결국 쇠락하고 말았다. 

고민하던 빌바오 당국은 마케팅의 대가 필립 코틀러를 불러 도시의 리브랜딩을 부탁했고, 그는 파리의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가 필요하다며 미술관 건립을 건의했다. 문화의 힘은 셌다. 1991년 세워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으로 관과 시민의 협력은 착착 진행되었고, 결국 빌바오는 '유럽에서 가장 여행하고 싶은 도시 10위'에 올랐다.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가 여수를 살린 이유      

'마케팅의 시대'에서 '브랜딩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이십 년 넘게 광고회사를 다니며 마케팅 일을 해왔던 나는 허구한 날 눈만 뜨면 마케팅이며 브랜드를 걱정했고 지금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도시 리브랜딩'이라는 장르는 다소 생소하고 어렵다. 그래서 <도시X리브랜딩>이라는 책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디자인 전문가와 PR 컨설턴트, 그리고 <오마이뉴스> 기자 세 사람이 힘을 합쳐 함께 쓴 이 책은 도시의 리브랜딩을 말하기에 앞서 프라이탁(FREITAG)이나 탐스(TOMS), 에비앙(Evian) 등을 예로 들며 마케팅과 브랜딩의 차이부터 똑소리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마케팅이 '지금 당장'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게 만드는 목표를 가졌다면 브랜딩은 '지속적으로' 브랜드의 신념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도시를 되살리거나 바꾸는 건 단타로 치고 빠지는 마케팅이 아니라 군불 때듯이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일수록 제대로 된 방향성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2023년 12월 20일에 출간된 책 <도시×리브랜딩>(오마이북, 박상희·이한기·이광호).
ⓒ 오마이북
우리나라는 해마다 봄이 되면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가 온 나라를 뒤덮는다. 작곡가 장범준은 이 곡 하나로 매년 10억 원씩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 노래와 함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또 하나의 곡은 '여수 밤바다'다. 여수에 가본 사람은 누구나 그 도시의 화려한 조명을 기억할 것이다. 

버스커 버스커는 여수 밤바다에 '낭만'이라는 스토리를 입혀 팬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렇다면 이것은 버스커 버스커의 승리인가, 여수라는 관광도시의 승리인가. 정답은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여수의 조명은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이렇게 노래 하나로 낭만적인 아이덴티티가 만들어진 것이다.      

범죄도시라는 악명을 쓰고 있던 미국의 뉴욕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고 유명한 도시 슬로건이라 추정되는 'I♥NY(I Love NewYork)' 덕분에 현대미술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도 마찬가지다. 마약과 매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암스테르담은 'I amsterdam'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깨끗하고 밝은 도시로 리포지셔닝 했다. 

방법은 암스테르담의 철자를 변경해 '아이(I) 엠(am) 스테르담(sterdam)'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언뜻 보면 말장난 같지만 언어유희에 진정성 있는 대의명분을 얹으면 재치있는 캠페인이 된다. 열린 도시를 표방한 덴마크 코펜하겐의 'cOPENhagen' 캠페인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이름 안에 들어 있는 'OPEN'이라는 단어만 도드라지게 표시해 자신이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도시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에 똑같은 도시는 없다     

냉전시절 독일에 온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2000년 전에 '나는 로마 시민'이라는 말이 자랑스러웠다면 지금은 '나는 베를린 사람(Ich bin ein Berliner)'이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라는 연설로 독일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라는 과거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독일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 2008년 나온 'Be Berlin' 캠페인은 이 연설문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짧은 슬로건 하나가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복잡하고 많은 내용을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직 AI(인공지능)가 따라오지 못하는 인간의 창조 영역 가운데 하나다.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는 뜻의 'All ways INCHEON'이나 영월을 젊은(Young) 달(月)로 재조립한 '영월Y파크'는 그런 노력의 산물이고, 결과적으로 해당 도시 리브랜딩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아이엠스테르담(Iamsterdam)' 상징물.
ⓒ 김지현
MBTI가 유행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에서 클럽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번개를 제안한 멤버들은 자기소개 시간에 너나 할 것 없이 MBTI 결과를 밝혔다. 심리학을 바탕으로 만든 성격유형 테스트인 MBTI는 자신의 성격이나 지향점이 어떤 성향인지 규범화시킨 것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열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알파벳 유형이 나오더라도 좋거나 우수한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도시 리브랜딩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못 사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정체성이 더 뛰어난 곳이란 없다. 자신만의 색깔과 지향점을 제대로 살리기만 한다면 어떤 도시든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된다.      

당신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     

2년 전, <도시X리브랜딩>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한기 <오마이뉴스> 기자와 저녁을 먹으며 '나이테'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똑같은 나무라도 기후에 따라 나이테 모양이 달라지듯이 도시에도 나이테가 있다면 사는 사람들이나 지향점에 따라 그 모양이 다 다를 것'이라는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야기가 변하고 더해져 이런 멋진 책이 되었다. 

그는 책 말미에 '도시를 도시답게'라는 일반적인 말이 브랜딩을 거치면 '그 도시를 그 도시답게'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로 바뀐다고 하면서 "도시 리브랜딩의 최고 가치는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고 밝히고 있다.      

좋은 책에서는 배우는 것도 많다. 나는 '힙한 도시'의 대명사인 미국 포틀랜드의 슬로건 'Keep Portland Weird(포틀랜드는 괴짜로 살게 좀 내버려 둬)' 편을 읽으면서, 한 지역의 문화예술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규모를 측정하는 점수를 '보헤미안 지수(Bohemian Index)'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수는 도시가 창조성과 예술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지방자치단체장이 문화예술을 얼마나 비중있게 지원하는지 판단하는 척도인 것이다.
 
 20여 년간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 2020년 퇴직 후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등을 펴낸 편성준 작가.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인 뒤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을 통해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고 있다. 아울러 '독하다 토요일', '소금책' 등 책과 관련된 모임도 운영하고 있다.
ⓒ 편성준 제공
    
반가운 사람도 만났다. 서울 광장시장의 '고향칼국수'는 자주 들르는 단골집인데, 이 책에서 넷플릭스의 <길 위의 셰프>를 소개하면서 이 칼국수집 사장님이 나온 것이다. 포틀랜드 편에서 본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원' 이야기도 이 책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일이다. 

1971년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원으로 등재된 이 지름 61cm짜리 공원은 <오리건 저널(Oregon Journal)>의 칼럼니스트 딕 페이건(Dick Fagan)이 마감시간에 임박해서 지면을 채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만들어졌다. 자세한 사연이 궁금한 사람은 어서 이 책을 구입해 읽어보시기 바란다.       

당신을,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라

'장소성'이라는 게 있다.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나 캐릭터가 달라진다. 나와 아내가 아파트 대신 성북동의 작은 한옥을 고쳐서 사는 것도 장소성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내라지만 마당이 있고 기와지붕이 있는 집은 사람들에게 '한 번 가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집에서 열리는 책 쓰기 워크숍은 물론 '독하다 토요일'이나 '소금책' 같은 독서 관련 행사들도 이런 자연스러운 차별화에서 나왔다. 

누구나 도시를 리브랜딩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행정 책임자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도시 브랜딩처럼 당신의 마음도 누군가 머물고 싶은 장소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만의 매력을 가꿀 수 있고 이는 타인의 호감과 기대를 얻는다. 당신이 누군가 살고 싶은 도시가 된다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우리가 이 책을 읽는 궁극적 이유는, 또는 이 책의 효용은 바로 이런 '생각의 확장'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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