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정치인이자 사상가… 김대중 다시 읽기
탄생 100주년 맞아 서적 출판 러시
그가 남긴 불멸의 정치 금언 조명
옥고 속에 꽃핀 사상가적 면모 살펴
지난 6일 여야의 주요 정치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출판계는 ‘김대중의 말’ ‘사상가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옥중서신’ 등 김대중 관련 책들을 쏟아내며 김대중 다시 읽기 바람을 조성하고 있다. 다큐 영화 ‘길위에 김대중’도 개봉됐다.
‘김대중의 말’(태학사)은 김대중추모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정진백이 김대중의 연설, 강연, 성명, 법정진술, 옥중서신, 인터뷰, 대담, 기념사, 저서 등에서 엄선한 글 130편 가량을 시기 순으로 수록했다. “서생적 문제 의식을 갖는 순수성과 더불어 상인적 현실 감각을 갖는 실천적인 자세의 두 가지가 하나로 조화되어야 한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 발짝만 앞에 서서 이끌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같은 불멸의 정치 금언들을 확인할 수 있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김대중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1월에 발표된 글에서 “우리가 열원하는 경제의 부흥·재건이란 그것이 직선적으로 민생의 안정과 복리 증진에 기여될 때에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실업보험, 양로보험, 학업보험, 흉작에 대한 보장 등 사회복지제도가 조속히 실현됨으로써 민생의 기본적 안정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0년 11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유세에서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능력 계발을 위해서 대통령 직속하에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둠으로써 우리나라에 위대한 어머니, 훌륭한 아내, 그리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능력이 최대 한도로 발휘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공약했다.
김대중은 1950년대에 이미 사회복지를 언급했고, 1970년에 여성위원회 설치를 약속했다. ‘김대중의 말’을 보면 그가 불굴의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지식인이었고, 진실한 신앙인이었으며, 무엇보다 사상가라는 점을 알게 된다.
국내외 학자들의 논문 6편으로 구성한 ‘사상가 김대중’(지식산업사)은 김대중을 사상가로서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책이다. 미국 센트럴미시간대 철학과 교수인 호프 엘리자베스 메이는 김대중의 정치가 사상적 특징을 가지게 된 배경으로 그의 신앙에 주목한다. “개인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 김대중을 이끈 원칙은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었다.”
김대중은 1970년대의 구금과 수감 중에 주로 기독교적 의미-관점을 적용해 공포, 무서움, 불안 등과 같은 ‘내적 장애’를 없애는 방법을 터득했다. 박정희 묘지를 방문하고 전두환 체포에 반대했던 김대중의 용서와 화해라는 정치철학도 신앙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메이는 김대중의 좌우명인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 “김대중은 ‘양심’을 만인 속에 들어 있는 신의 목소리로 이해했다”면서 “양심의 지시에 유의하는 삶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김대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에 그러한 삶이 성공적이라 믿었다”고 분석했다.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김대중의 사상을 ‘제2근대’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근대화는 돌진적·물질적·양적 근대화(제1근대)와 소통적·성찰적·질적 근대화(제2근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박정희가 제1근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김대중은 지금도 지속되는 제2근대를 시작한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돌진적 근대화는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부작용이 누적돼 위험사회가 출현했다. 민주주의 파괴, 인권 억압, 지역차별, 빈부격차 등이 그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직면한 외환위기는 돌진적 근대화가 초래한 위험사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상진은 김대중이 ‘국민과의 대화’ 같은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물질문명의 팽배로부터 전통문화의 재창안으로, 민족중심에서 지구적 보편주의로, 정경유착에서 정보혁명으로, 정치적 양극화로부터 국민 화합과 통합으로, 경쟁적 시장경제에서 생산적 복지로, 남북대립에서 남북교류협력으로 가는 길을 열었으며 이것을 ‘제2근대 전환’으로 평가한다.
김대중의 사상을 서양의 민주주의 이론과 동학, 유교 등 동양의 전통사상을 융합한 한국 고유의 민주주의라고 본 노명환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그동안 거의 주목되지 않았던 김대중의 여성주의 철학을 논한 이영재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교수의 논문도 흥미롭다. 이영재는 1970년 여성위원회 공약, 1989년 가족법 개정, 2001년 여성부 출범 등 김대중의 정치 여정에서 여성 인권이라는 주제가 일관된다며 “여성주의 정치이념은 사상가 김대중에게 부록이나 후순위가 아니었다”고 평했다.
김대중의 첫 자전에세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도 30년 만에 재개정판으로 나왔다.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머물며 직접 쓴 책이다.
‘옥중서신 1’(시대의창)은 수감 중 부인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책으로 ‘김대중 옥중서신’의 개정판이다. 개정판에는 2009년 서거하던 해에 남긴 ‘김대중 마지막 일기’를 새로 수록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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