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외도 의심한 아내... 유혹을 주문하다
[김성호 기자]
중년의 위기라고들 말한다. 중년에 위기라니. 청년시절 품었던 꿈과 사랑, 이상과 열망이 어느덧 이뤄낸 것과 이룰 수 있는 것, 마침내 포기한 것들까지 하나둘씩 제 자리를 찾아가는 안정된 시기에 대체 무슨 위기가 있다는 건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인 청년들이나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만 가는 노년에게 위기란 말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나 삶이란 복잡하여 인생 가운데 가장 안정된 국면에서도 위기가 피어나는 모양이다. 소설은 물론 드라마와 영화 같은 대중 콘텐츠 가운데 중년의 위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북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라거나 미국 드라마 산업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 같은 작품은 중년여성의 숨겨진 욕구를 상업적으로 자극한 것이 성공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클로이 포스터 |
ⓒ 시너지 |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 현실은 달랐다
캐서린(줄리안 무어 분)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사는 여자다. 주변에 입소문까지 난 산부인과 개업의로 종일 쉬는 시간 없이 일해야 할 만큼 성공가도를 달린다. 교수인 남편 데이빗(리암 니슨 분)은 중년의 나이에도 건장하고 잘 생긴 용모가 눈에 띄는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아내를 지극히 생각하는 섬세하고 다정한 남자다. 여기에 무탈하게 잘 자란 아들까지 두고 있으니 캐서린 부부를 아는 이들은 그들이 도시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현실은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적잖이 다르다. 한때는 온 가족이 단란하게 어울렸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가족들 간에 온기를 느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캐서린도 데이빗도 서로의 업무로 너무나 바쁘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엄마와 말 한 마디 섞는 것도 꺼려할 정도다. 바깥에는 문제없는 부부처럼 행세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어딘지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캐서린, 그럼에도 좋은 아내이자 엄마이고 싶은 마음이 그녀를 조급하게 한다.
▲ 클로이 스틸컷 |
ⓒ 시너지 |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
같은 시각, 집에서는 캐서린이 친구들을 잔뜩 불러다가 깜짝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깜짝파티니 만큼 데이빗에겐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데이빗이 비행기를 놓쳤다며 전화를 걸어오고, 캐서린은 잔뜩 실망한 채 찾아준 친구들에게 데이빗이 오지 못한단 사실을 알린다.
그로부터 캐서린은 데이빗에게서 어딘지 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혹시나 하여 확인한 SNS엔 그가 젊은 여학생과 술집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이따금씩 데이빗이 학생들과 채팅을 나눌 땐 그가 저에게는 더는 보이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발견하게도 된다. 혹시 그가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닐까, 캐서린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져만 간다.
▲ 클로이 스틸컷 |
ⓒ 시너지 |
관객 공감 끌어내는 중년의 위기
그렇게 캐서린은 클로이에게 제 남편을 유혹해달라 제안한다. 시작은 그저 남편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그에게 말이나 붙이고 반응을 보려던 것이었으나 클로이가 남편이 제 자리로 건너와 이것저것 대화까지 나누었다 답하니 멈출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캐서린은 점점 더 클로이를 자주 만나고, 그녀에게 좀 더 농밀한 유혹을 요구한다. 그러다 남편과 그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음을 알고 절망한다.
영화는 남편이 더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불안, 또 제 마음처럼 화목해지지 않는 가정에 대한 불만, 더는 직업적 성취가 내면을 채우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거듭 의심하고 실망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주목한다. 심신과 관계가 건강할 때라면 별 위협이 되지 않을 만한 일에도 그녀는 크게 흔들리게 되는데, 그로부터 남편이며 아들과의 관계 또한 갈수록 꼬여가게 되는 것이다.
▲ 클로이 스틸컷 |
ⓒ 시너지 |
일상적 위기를 스릴러의 소재로 전환하는 솜씨
영화는 관객 앞에 제 사정이 낱낱이 알려진 캐서린과 관객에게 그 사정이 감춰진 클로이의 사이를 오가며 공감과 신비로움의 이점만을 취한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한 여자가 충분히 알아서 더 안쓰러운 이가 되고, 매일 다른 이에게 제 성을 파는 여성은 더없이 치명적인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 역전된 상황이 주는 긴장과 불안은 시간을 건너 이 영화가 명작으로 회자되도록 한 결정적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기에 살면서 수많은 유혹에 흔들렸다는 남편 데이빗의 고백과, 남편보다 빨리 급격히 시들어가는 제 외모에 절망하는 아내 캐서린의 호소 사이에서 관객은 나이가 들며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위기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쉽사리 터놓을 수 없는 문제가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영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제가 가진 그래도 귀한 것들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클로이>는 일상적 위기를 스릴러의 장르적 재미로 변환해낸 인상적인 작품이다. 누구나 겪어봄 직한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스릴러의 소재가 될 공포와 긴장, 불안을 길어낸 솜씨가 대단하다. 그렇게 길어낸 요소가 스릴러의 장치로 효과적으로 기능할 때 관객은 제 일상과 영화가 구현한 사건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영화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