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15분 도시 서울과 직장 분산

2024. 1. 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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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도시’ 관점에서 본 서울

2020년대 이후 언론에 자주 등장한 키워드 가운데 ‘15분 도시’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한 도시의 변화는 매우 급격하게 전개되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직장인들로 가득하던 도시 한복판에 유동 인구가 줄어들면서 수많은 산업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22년 후반 이후 상황이 진정되면서 도시들마다 회복의 기미를 보이긴 했지만 도시의 변화와 미래에 대한 관심은 가실 줄은 몰랐다. 이런 기조 속에 자주 언급된 것이 ‘15분 도시’다.

‘15분 도시’는 2000년대 이후 피부로 와닿는 기후변화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방안 중 하나로, 한마디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권을 대략 15분 이내로 한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먼 곳으로 가기 위해 자주 이용하던 자동차 같은 이동 수단을 덜 이용하게 되니 화석 연료 배출물을 줄일 수 있다. 이동 시간이 줄어들면서 가족과 보내거나 취미나 운동 등에 시간을 더 쓸 수 있으니 삶의 질도 높일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이 긴 대도시일수록 그 효과는 더욱 크다. 빈부격차로 인한 생활 인프라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동 거리가 줄어들면서 주민들 사이에 거주 지역에 대한 애착이 생기면서 공동체 의식이 깊어질 거라는 기대,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지 않다.

유럽에서 먼저 나온 ‘15분 도시’는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그 논의가 활발해졌다. 유럽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미국과 비교해 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인구 밀도가 높다. 미국과 비교해 근린 상업 시설이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다. 도시 안의 격차가 미국만큼 심하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은 미국보다 먼저 기후변화 관련 정책을 도입했고, 기후변화 대책 마련 차원에서 도시의 당면 과제와 미래에 관해 활발한 논의를 펼쳤다. ‘15분 도시’는 그런 논의의 일환으로 등장했다.

미국에서 ‘15분 도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도시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도시의 당면 문제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기 때문이다. 2020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을 계기로 사회의 여러 격차에 대해 관심이 커진 것도 한몫했다.

서울 도심의 오피스 빌딩 밀집 지역.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뉴욕 같은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미국의 많은 도시는 인구밀도가 매우 낮다. 일자리는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동 시간은 길어진다. 차가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저소득층 흑인 인구 비중이 높은 도시에는 대형 마트가 거의 없다. 장을 보려면 대형마트와 비교해 값이 비싼 편의점 같은 상점에 의존하거나 사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대형 마트를 찾아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15분 도시’다.

서울을 ‘15분 도시’ 관점으로 보면 어떨까. 서울은 인구 밀도가 높고 동네마다 근린상업 시설이 많다. 아파트 단지에는 상가가, 주택가에는 크고 작은 가게나 전통시장이 많다. 그렇다고 서울이 ‘15분 도시’에 가까운 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가속화된 재개발은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로 인해 지역 간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떤 면으로는 미국 도시와 비슷하기도 하다. 아파트로 재개발된 지역에는 주로 가격경쟁력이 강한 대형 마트와 체인점이 밀집해 있다. 반면 오래되었거나 ‘재개발을 기다리는’ 지역에는 대형 마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문을 닫은 근린상업 시설도 많다. 근처에 시장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요즘 시장은 식료품을 팔기보다 식당가로 변해가고 있어서 한계가 있다. 주민들은 값이 비싼 편의점 또는 슈퍼마켓에 의존하거나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먼 곳으로 장을 보러 가야 한다.

아파트 밀집 지역에는 병원도 많다. 일반 주택가는 그렇지 않다. 전문병원일수록 더 멀리 길을 나서야 한다. 유치원부터 학원들도 주로 아파트 단지 안에 모여 있다. 많은 학부모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 일반 주택에서 산다는 건 썩 현실적인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수도권을 포함한 서울 인구는 2022년 현재 약 2600만명에 달한다. 규모로만 보면 유럽이나 미국 여느 광역도시보다 크다. 대부분 회사는 사대문 안과 강남에 집중되어 있다. 여의도 같은 부도심도 있긴 하지만 화이트칼라 직종이나 상당수 관리 직종은 사대문 안 또는 강남으로 출퇴근한다. 수많은 시민이 출퇴근을 위해 멀리서 오가고 있다. 대중 교통망이 훌륭해도 절대 시간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직장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집값의 벽이 워낙 높아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서울의 대중 교통망은 매우 훌륭하다. 이동이 편리하다는 건 큰 장점이다. 자동차 의존도가 훨씬 높고 대중교통망이 뒷받침되지 않는 곳이라면 ‘15분 도시’를 목표로 삼아야 하지만 서울이라면 조금 여유 있게 ‘20분 도시’를 목표로 삼아도 된다. 모든 시민의 집에서 20분 안의 거리에 생활 편의 시설과 근린 상업 시설을 두는 걸 목표로 한다면 일상의 여러 격차를 한결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지역마다 대형 마트가 있는 공용 시장을 만들거나 의료와 교육 시설 배치를 위해 공적 지원 제도의 적용도 고려해볼 만하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직장이다. 회사 또는 기관 등을 강제로 이동시켜 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지역에 사무실을 추가로 마련하는 경우 직·간접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2000년대 개발한 디지털미디어시티(DMC)나 2010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서남권의 G밸리처럼 새로운 사무실과 연구단지를 개발하면 고용 분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차차 직장 가까이 사는 시민이 늘어나게 되고, 기나긴 통근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공적 자금의 투자와 함께 현명한 정책이 물론 필요하다.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시가 하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내는 것, 서울의 저력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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