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곡소리 나는데 미국에선 환호가 터졌다 [대통령을 위한 반도체 특별과외]
[이봉렬 기자]
대통령님, 기업들이 매년 펴내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라는 걸 읽어 본 적 있습니까? 전 다는 아니더라도 반도체 회사들의 보고서는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입니다. 기업이 경영활동과 관련해 제공하는 보고서는 재무적 성과를 중심에 둔 회계보고서가 핵심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기업이 지속 가능한 상황인지를 확인하기를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 속에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내용까지 포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 ESG는 우리 사회가 기업에 요구하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
ⓒ 클릭 ESG |
ESG는 단순한 추세가 아닌 시대적 요구입니다. 1980년대 이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 또는 공유가치 창출 등 기업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이 2000년대 들어 ESG로 조합을 이뤄 나타났고, 필요성을 느낀 정부와 기업들이 제도화에 나서게 된 겁니다.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연금과 기금을 대상으로 ESG 공시를 의무화했고, 2006년 UN PRI(유엔책임투자원칙)에서 ESG 투자 원칙을 발표하면서 유럽 전체에서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에 대한 공시 강화가 추진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2019년부터 대형 상장사를 대상으로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기업지배구조 핵심 정보를 투자자에게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규정했고, 2025년부터는 상장사를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ESG 공시 의무화를 추진할 예정입니다.
ESG 중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E, 즉 환경이 요즘 가장 주목 받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회사인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2020년 1월, 투자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게 보낸 서한에서 "기후 리스크가 곧 투자 리스크"라고 말한 게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월가의 투자자들도 기후 위기에 대응하지 않는 기업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업들의 연례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현황이고, 그건 곧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사용할 것이며, RE100 목표는 언제 달성할 것이냐 하는 것으로 표시가 됩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회사들 역시 대부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삼성전자, SK하이닉스, DB하이텍, 이 세 회사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대통령님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표 반도체 제조회사들은 어떤 식으로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있는지 대통령님이 도와야 할 게 있지는 않는지 같이 확인하자는 겁니다.
▲ 삼성전자의 재생에너지 전환 현황. 국내 반도체 사업장만 2050년으로 잡혀 있습니다. |
ⓒ 삼성전자 |
▲ SK하이닉스의 재생에너지 사용현황. 해외 사업장은 이미 100%인데 국내 사업장만 재생에너지 사용이 적습니다. |
ⓒ SK하이닉스 |
2030년까지 협력업체까지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탄소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는 애플이나 2040년까지 전 세계 사업장에서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인텔의 공격적인 목표에 비하면 2050년은 멀어도 너무 멉니다.
▲ DB하이텍의 재생에너지 사용현황. "고객사에서 진행하는 RE100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문구가 특징입니다. 고객사에 납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추가 비용을 내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
ⓒ DB하이텍 |
RE100에 가입하여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는 달리 DB하이텍은 아직 RE100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보고서에는 "고객사 RE100 프로그램 참여"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보고서에 적힌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객사에서 진행하는 RE100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온실가스 감축 등 탄소중립을 위한 중장기 로드맵을 구축하고, 고객사 제품 생산에 사용되는 전력원을 2028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연도별 전환 방안 및 투자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전사적으로 RE100을 달성할 수는 없지만, 반도체 납품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재생에너지 100% 이용을 요구한 특정 고객사용 제품에 한해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DB하이텍은 부천과 상우 두 곳에 팹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중 부천 팹, 그것도 0.15마이크로미터 공정의 특정 제품군에만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고 보고서에 적혀 있습니다.
팹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특정 공정, 특정 장비만 골라서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DB하이텍이 사용하는 방식은 실제로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에는 '녹색 프리미엄'을 구매하고, 2025년부터는 'REC 구매'를 통해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것으로 인정받겠다는 겁니다.
▲ 녹색프리미엄이란 재생에너지가 필요한 회사에서 전기요금에 추가 요금을 납부하여 재생에너지 사업의 재원으로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
ⓒ 에너지마켓플레이스 |
REC(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한 사업자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증명서인데 REC를 구매하면 그만큼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걸로 쳐서 RE100 인증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재생에너지 사업자에게 간접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라 기업 입장에서는 추가 비용이 들고, 실제 온실가스 저감 효과는 가장 낮은 방식입니다.
RE100 달성을 통해 실질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겠다는 글로벌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사업자로부터 직접 전력을 구매하는 전력구매계약(PPA)이나 자체 설비 발전을 통해 재생에너지를 조달하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 기업들은 자체 설비 발전, PPA같은 효과적인 재생에너지 수급 방식을 택하지 않고 같은 전기를 웃돈을 주고 사 오는 격인 '녹색 프리미엄'이나 'REC 구매' 같은 방식을 선택하는 걸까요? 왜 우리 기업들은 외국에 있는 사업장은 이미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했거나 조만간에 전환할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 유독 한국에서는 2050년까지로 아주 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요?
이건 자문자답이 아니라 대통령님께 묻는 겁니다. 집권 이후 태양광 등 전 정부에서 추진했던 재생에너지 관련 사업은 모두 때려잡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를 오히려 줄여 버린 대통령님께서 혹시 우리 기업들의 이런 애달픈 사정을 알고나 있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한국에서 문을 닫은 한화큐셀, 미국에서 대규모 수주
지난해 11월 말, 태양광 모듈을 생산하는 한화솔루션 큐셀부문(한화큐셀)이 국내 태양광 산업 위축의 여파로 충북 음성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습니다. 2015년 설립해 8년 만에 문을 닫으면서 한화큐셀의 국내 모듈 생산능력은 6.2GW에서 2.7GW로 축소하고, 생산직 노동자 18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습니다.
▲ 마이크로소프트와 미국 내 사상 최대 규모인 12GW의 태양광 모듈 공급계약을 체결한 한화큐셀 |
ⓒ 한화큐셀 |
한국에서는 대통령님의 태양광 때려잡기 때문에 공장을 폐쇄하고 직원을 내보낸 우리 태양광 회사가 미국에서는 재생에너지 투자 정책에 힘입어 사상 최대의 수주를 거둔 것입니다. 받은 수주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한화큐셀은 미국 조지아에 공장을 짓고 미국의 노동자를 고용할 겁니다. 신규고용 인원만 2600명이란 보도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곡소리가 나고 미국에선 환호가 들려오는 판국입니다. 대통령님은 스스로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라고 했습니다. 무슨 영업사원이 영업을 이런 식으로 한단 말입니까?
우리 기업들은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ESG경영도 하고 지속가능경영보고서도 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생에너지에 대한 대통령님의 정책에 발이 묶여 같은 전기를 쓰면서도 웃돈을 내거나, 이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에 공장을 세우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요? 재생에너지 정책의 쇄신을 다시 한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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