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동훈과 ‘여의도 문법’
지난해 11월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5000만이 쓰는 언어를 쓰겠다”며 ‘여의도 사투리’를 멀리할 것처럼 말했을 때 이미 예감했다. ‘정치를 쉽게 보는구나’라고 말이다. ‘여의도 언어’도 아니고 여의도 사투리라는 표현을 쓴 것만 봐도 그의 내심이 어떨지 약간은 짐작이 갔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켜본 그로서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실 없는 정치인의 말을 여의도 사투리로 폄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재밌는 건 그런 그도 여의도 사투리를 빠르게 학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일 “대구는 저의 정치적 출생지”를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각종 인연을 붙이더니 지난 8일엔 “국민의힘은 ‘강원도의 힘’이 되겠다”, 10일엔 “부산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다. 이쯤 되자 “한동훈이 ‘팔도 사나이’가 되려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사실 초급 수준의 여의도 사투리는 따라 하기 쉽다. 사돈의 팔촌까지 끌어다가 인연을 갖다 붙이고,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것처럼 말하는 여의도 사투리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여의도 정치인이 되려면 ‘여의도 문법’에 익숙해야 한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와도 밤새도록 대화해 주고받기를 하고, 위기가 닥치면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측근도 읍참마속하는 게 여의도 문법이다.
지금 한 위원장의 여의도 문법 수준은 어떨까. 미안한 얘기지만 아직 측정 불가다. 이른바 ‘김건희 특검법’과 관련해 용산 대통령실의 뜻에 반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직 여의도 문법이 어색한 건지, 아니면 실력을 숨기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대신 그는 여전히 ‘서초동 사투리’ 혹은 ‘서초동 문법’으로 대화하는 걸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지난달 26일 취임사 때 인용됐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 해프닝이 대표적이다. ‘지금’이라는 단어 겨우 하나가 일치했을 뿐인데, 법조 기자 출신 정치부 기자들은 용케도 알아듣고 받아썼다. 고루한 정치부 기자의 눈엔 ‘그 사람’, ‘지금’이란 단어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가사와 더 비슷한데도 말이다.
여의도 사투리에 적응한 한 위원장은 최근 기자의 질문을 자주 피하고 있다. 기자들을 대거 대동하고 일정을 다니면서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는 건 여의도 문법으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여의도 사투리를 쓰면서 서초동 문법을 고집하는 건 몸은 여의도에, 마음은 서초동에 있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왕 ‘동료 시민’과 함께하려면 온전한 여의도 문법부터 익히는 게 순리다.
허진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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