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아이 위한 엄마의 도전... "수인아, 난 포기 안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안미선]
▲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 앞에 앉아있는 김명임씨(2). |
ⓒ 안미선 |
말을 걸려고 시작했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은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 틀어박혀 있는 다른 유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고,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작은 담소와 웃음을 나누려고 했다. 함께 모여 있으면 그래도 나아지니까 조금이라도 그 온기를 이어가려고 말할 거리를 찾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까만 활자가 쓰인 대본을 받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이곳에서는 좀 더 크게 웃어도 되고 좀 더 크게 화내어도 되고 좀 더 크게 울어도 되었다. 마음껏 말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거였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건 완전히 새로운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일이었다.
2015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대본 읽기'로 출발해 2016년 3월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 만들어졌다. 그해 여름, <그와 그녀의 옷장>을 첫 공연작으로 무대에 올렸고, 그다음 해에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를 두 번째로 공연했다. 첫 번째 창작극 <장기자랑>을 비롯해 작품 공연은 해를 거듭하면서 이어졌고 노란리본 단원들의 새로운 여행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극단이 처음 생길 때부터 함께해온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배우 김명임씨를 지난해 10월 안산에서 만났다. 2학년 7반 곽수인의 어머니이자 배우인 그는 보랏빛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연극 속에서 그는 아이에게 농구를 가르쳐주는 씩씩한 엄마이자 혼자 글쓰기를 좋아하는 외톨박이 소녀였다. 이웃에게 인심 좋게 음식을 서비스로 내주는 식당 주인이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고 같이 가자고 손을 내미는 길 위의 유족이기도 하다.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가 된 <장기자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2023년 10월 광화문광장 집중피켓팅을 하는 김명임씨. |
ⓒ 안미선 |
"<장기자랑> 연극작품은 우리 아이들 약전(4.16단원고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을 보고 작가가 대본에 녹여놓은 거예요. 저희는 다른 배우가 대사를 말할 때 '아, 저건 누구 이야기야, 우리 아이들 얘기가 나오고 있네' 하고 바로 알아요. 그래서 배우인 엄마들이 이야기에 더 집중하기 쉬웠고 극을 공연하면서 재미있게 할 수 있었어요."
<장기자랑>에서 김명임씨는 소심하고 조용하고 상상 속의 친구를 둔 아영의 역할을 맡았다. 연극이 시작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맡아 무대를 지키는 인물이지만 관객에게 강하게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아닌 듯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아영이는 '물처럼 조용한 아이'인데 나중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밝아지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연극 속에서 그는 어느 순간 자기 아들의 모습이 되어 그 눈으로 친구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수인이 하고 동화됐어요. 극 중 아영이가 친구들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재미있어하고 웃고 그 자리에 끼어 있다고 즐거워하는 인물이거든요. 우리 아이도 친구들과 어울릴 때 되게 웃음이 많은 아이였고 얘기를 들으면서 즐거워했어요. 그 순간, 내가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수인이가 친구들 말을 들으면서 즐거워하는 거 같았어요."
<장기자랑>을 연극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소현 감독)로 만들어져 지난해 개봉했다. 영화관으로 GV를 다니면서 일곱 명의 배우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자기 삶을 책임지고 꾸려가는 생활인으로서, 때로 경쟁하고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이 스크린에 소개됐을 때 관객들이 더 크게 호응했다는 것. 낯선 이들에게 자식의 교복을 입고 연극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전달됐다.
"전국으로 연극 공연을 다니면서 알게 됐어요. 이분들은 우리를 봐주기 위해 일부러 오시는 분들이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해주는구나. 우리는 무대에 서서 이런 방법으로라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는 거예요. 또 '함께해 달라'고 말하려 가는 거지요. 우리를 응원하는 든든한 지지자들 앞에서 공연하는 거라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져요. 사람들이 얼마나 집중해서 봐주는지 느껴져요. 반응이 있거든요."
"너를 대신해 엄마가 왔어"
처음 공연 때에는 캄캄한 객석이 보이지 않아 되레 연습 때처럼 편하게 진행했다. 실수까지 하면서 연기를 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조명이 들어온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공연을 거듭할수록 무대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느껴졌다. 김명임씨는 연극 공연이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하는 데 동행하는 징검다리라고 여긴다.
"가장 기억에 남은 공연은 단원고등학교에서 한 공연이었어요. 아이가 다녔던 학교에서 공연하면서 '우리 애도 저 밑에 앉아서 이 연극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연극이 끝나자 단원고 학생들이 우리에게 와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고 울면서 안아주더라고요. 그동안 다른 학교들이 세월호 추모식을 하거나 관련 활동을 할 때 단원고는 너무 조용해서 속이 상했거든요. 그게 풀렸어요. 떠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었어요. '너희 학교에서 너희를 잊어버린 게 아니야, 수인아, 단원고도 똑같은 마음이래.'"
지역의 대안학교에 공연갔을 때, 배우들이 무대에서 율동을 하자 관객석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와 함께 춤을 췄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던 이들은 희생자와 생존자의 가족이었지만, 한편 교복을 입은 극 중의 고등학생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자신들을 또래 친구처럼 맞아주며 같이 놀아준다는 느낌에 그들은 가슴이 먹먹했다. 제주도 4.3연극제에서 공연할 때는 수학여행에 와야 했을 아이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섰다. 아이들이 끝내 가지 못한 제주도에 그 어머니들이 와서 서 있었다.
"너는 못 왔지만 내가 왔다. 수인이 대신 영만이 대신 순범이 대신 윤민이 대신 동수 대신 예진이 대신… 모든 아이를 대신해 가서 거기서 공연했어요. 감회가 남달랐어요. 우리가 마음속으로 울고 하는 거지만 무대 위에서 울 수 없으니 계속 웃고 떠들어요. 관객들은 무대 아래에서 우리 아픈 걸 다 알고 죄다 울고요. 우리를 혼자 쓸쓸하게 두지 않고 우리 아이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온 거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다니는 거예요. 아직 진상규명이 안 됐어요, 우리 대신 저분들이 울어주니까, 우리는 꿋꿋하게 넘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야겠구나 싶어요."
연극 속에서 그들은 그때 아이들의 꿈을 대신해 춤추고 노래한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 겪었던 사회의 부당한 비난과 다시 맞서 싸운다. 비정규직 노동자같이 어려운 처지의 이들과 연대하는 마음을 담기도 한다. 오랜 세월, 국가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길에서 싸우던 일을 에피소드로 보여주기도 한다. 과거로 훌쩍 돌아가, 수학여행 잘 다녀오라고 준비물을 챙겨주며 손을 흔드는 평범한 엄마가 됐다가, 떠난 아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싸우는 투지에 찬 엄마가 되기도 한다. 무대 뒤에서 때로 그들도 운다.
"저는 무대에 서서 '저기 공연장 어딘가에 우리 수인이가 있어' 하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무대에 나갈 때 절대 떨지 않거든요. 용기가 나더라고요. 그냥 나가요. 우리 아이한테 이야기하러 나가는데 왜 떨리겠어요? 항상 아이가 그곳에 있다고 내 마음이 믿으니까. 아이가 엄마 이야기를 참 좋아했으니까. 공연 갈 때마다 '엄마가 오늘은 어떤 이야기 들려주는지 잘 들어봐' 하죠. 연극을 하면 아이들한테 내 역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거예요. "
김명임씨는 극단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세심하게 동료를 챙기고 오랫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는 결혼생활 십 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주눅 들고 산 데다 소심해서 남 앞에 나서서 말을 못 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무대에서는 떨지 않았다.
"엄마들은 다 해요"라며 농담처럼 그가 던진 말 속에 속내가 담겼다. "세월호를 알리는 또 다른 투쟁의 방법으로 연극을 선택했다"지만, 낯선 이들 앞에서 공연하기로 했을 때 그의 첫 마음에는 아이와 다시 만난다는 기대가 있었다.
"뭐든지 항상 이유가 궁금했던 아이라, '엄마, 왜?' 하고 자신이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 같은 거예요. 아이를 만나면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할까요? 선체조사위원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다 했는데 지금은 특별하게 말해줄 수 있는 명쾌한 결론이 없잖아요.
아이한테 '뭐라도 좀 하나 얻기 위해서 엄마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어떤 부분은 잘 안됐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걸 가지고 가야 해요. '엄마 참 열심히 살았어.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듣고 싶은 결과가 좀 부족하더래도 좀 봐줘. 근데 엄마가 뭔가를 일부러 안 하거나 어떤 활동을 할 때 게으름 때문에 안 한 거는 정말 없었어. 부모로서 부끄럽지는 않았어'라는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죠. 그거 하나 붙잡고 꿋꿋하게 가는 거예요."
▲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습실 앞에 선 김명임씨. |
ⓒ 안미선 |
아이를 빼앗아 간 이 혹독한 세상에서, 차가운 무대 위에서 그는 질문한다. 어떻게 해야 이 아픔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삶을 함께 지켜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꿈은 무대 밖에서도 현실이 되는지. 마침내 그 모든 아이가 돌아올 수 있는지.
"피해자들이 아직까지 진상규명 운동을 하지만 규명이 안 된 게 거의 대부분이거든요. 된 게 하나도 없어요. 어느 일이든 하나 실타래가 풀려서 올이 제대로 풀려나가면 선례가 생기는 거니까 나머지 것들도 하나둘씩 풀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태원참사가 났을 때 우리가 다시 2014년 4월 16일, 그 막막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부터는 심장도 떨리고 손도 떨리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이태원참사 때 희생된 아이들 보니까 우리 애들하고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사고를 당한 거예요. 저 유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나요? 그 사람들 걱정도 되고. 아, 우리가 좀 더 조금만 더 열심히, 조금만 더 강하게 했더라면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너무너무 미안했어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광화문 광장에서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하라는 팻말을 잡고 서 있었다. 지금은 극단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배우이자 (사)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일원이자 활동가로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팽목항에서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켜내기 위해 제대로 울어본 적 없다는 그였다. 단단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그는 무대에서는 다르다. 사람들과 어울려 끊임없이 말을 걸고 웃고 춤을 추었다. 한 번도 제대로 울어본 적 없는 그가 짓는 웃음을 바라본다. 그 웃음은 당신도 이 길에 함께해달라고 건네는 부탁이자, 우리가 나아간 만큼의 이야기를 품고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정답은 없어요. 저희가 가고 싶은 목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평지를 지나 거친 길을 걸어왔다면 이제 진짜 힘든 오르막길인데, 앞에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는 채 끊임없이 끝나지 않는 길을 걷는 기분이에요. 우리가 과연 목표까지 도달할지는 모르겠어요. 우리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들, 또 다른 유가족이 아니라 다른 어떤 형태의 사람들이 거기까지 갈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해요.
잊지 않고 기억하고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나 그런 모든 것들이 깔끔하게 마무리돼야 하잖아요.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만한 세상이 만들어져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달려온 거죠. 만약 우리가 넘어지면 그 순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어서 그쪽으로 나가지 않을까요? 새로 나온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우리가 함께 가거나 혹은 연결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주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 마음으로 그냥 가요.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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