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뜻'이라고 쓰고, '인간의 탐욕'이라고 읽는다
[이준목 기자]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Crusades)은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약 200여 년간 8차례에 걸쳐 이뤄진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대원정에서 비롯된 전쟁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서구권에서는 오랫동안 낭만적인 영웅담으로 미화되어 왔으나, 훗날 현대 역사에서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침략 전쟁이자, 신의 뜻을 빙지한 종교적 광기와 탐욕이 인류사에서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월 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3회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추악한 전쟁 , 십자군전쟁'편을 통하여 십자군 전쟁의 진실을 조명했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에 걸쳐있는 도시인 예루살렘(Jerusalem)은 고대부터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에게 중요한 성지(聖址)로 여겨져왔다. 11세기 무렵, 중앙아시아를 차지한 이슬람 계열의 셀주크투르크족이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를 차단했다. 또한 세력이 커진 셀주크 왕조는 비잔티움(동로마) 제국까지 침공했고, 이에 비잔티움은 서유럽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서유럽 국가들에 십자군 파병을 호소했다. 비잔티움이 정복 당한다면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당시 유럽은 동서교회 대분열과 신성로마제국의 존재 등으로 교황의 권위가 약해지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우르바노 2세로서는 이슬람과의 전쟁을 빌미로 삼아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분열된 교회를 통합시키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르바노 2세는 연설에서 이슬람 세력을 "사탄에게 사로잡힌 타락하고 경멸스러운 민족"이라고 폄하하며 "신을 찬양하고 기독교의 이름을 영광으로 여기는 국가를 이긴다면 이보다 더한 수치가 있겠는가. 이교도와의 전쟁은 나설 가치가 있는 전쟁, 마땅히 승리해야 할 전쟁이니 부디 출정해달라"라고 주장했다.
교황의 연설을 들은 군중들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데우스 로 불트/ DEUS RO VULT)'라고 열렬히 호응하며 전쟁을 지지했다고 한다. 중세시대는 신이 중심이 된 신정사회였고, 성지를 이교도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가톨릭계는 참전하는 이들을 위하여 신의 이름을 빌려 "십자군으로 명예롭게 죽은 형제는 하늘에서 불멸의 구원과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의 선교사는 곳곳에 교황의 메시지를 전파하여 참전을 독려했고, 이에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에서 귀족에서 평민, 성직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며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1096년 1차 십자군 원정의 막이 올랐다. 역사상 가장 먼저 결성된 십자군은 프랑스의 선교사이자 사이비 종교인이었던 은자 피에르(Pierre l'Ermite)라는 인물이 이끈 '민중 십자군'이었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평민과 부랑자, 부녀자, 거지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기강도 엉망이었던 민중십자군은 현지에서 약탈과 학살 등 온갖 추태를 부린 끝에 이슬람군에게 무기력하게 섬멸 당했다. 유럽을 출발 때 10만여 명에 이르렀던 민중십자군 중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 것은 2000~30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첫발부터 잘못 내딛은 십자군의 변질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민중 십자군의 뒤를 이어 마침내 정규 십자군이 도착한다. 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귀족 영주들이 이끌던 정예 군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많이 묘사되는 십자군의 모습도 바로 이들에게서 유래했다. 십자군은 니케아라는 도시를 공략하면서 적군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하여 포로로 잡은 이슬람인들의 머리를 잘라 대포처럼 성으로 쏘아대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십자군의 도시 함락이 코앞으로 다가온 순간에, 니케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비밀협상을 맺고 십자군이 아닌 비잔티움에 항복한다. 십자군은 갑자기 니케아 성벽에서 휘날리는 비잔티움의 깃발을 보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군이 같은 편의 뒤통수를 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비잔티움과 서유럽 국가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고, 십자군 원정의 승리로 확보하게 될 정치적 이득을 저울질하고 있다.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어느새 영토와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으로 변질됐다.
또다른 성지인 안티오키아를 공략한 십자군은 8개월 만에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그간의 고생과 굶주림에 대한 분풀이 및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이슬람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십자군은 곧이어 성을 지원하려고 달려온 이슬람군에게 역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했으나, 성내에서 기독교의 성물인 '롱기누스의 창'이 발견되면서 다시 사기가 오른 십자군이 끝내 이슬람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하지만 십자군의 악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장거리 원정을 온 십자군의 고질적인 문제는 식량 보급이었다. 1098년 12월, 마라라는 마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십자군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을 훼손하고 인육을 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록에 따르면 십자군은 "어른들은 솥에 구워 삶고, 아이들은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구워먹었다"고 한다.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십자군에서는 식인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슬람인들의 시신을 모두 불에 태우기도 했다.
또한 십자군은 이슬람인들의 시신에서 배를 갈라 금화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슬람인들이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값비싼 금화를 삼켜서 몸에 숨긴다는 소문이 십자군 사이에서 퍼졌기 때문이다. '신의 명령'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각종 전쟁범죄와 반인륜적인 행태도 아무 죄의식없이 벌이는 십자군의 추악한 실체를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시작한 전쟁은 어느새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십자군이 출정한지 약 3년 만이 1099년 6월,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십자군은 성을 차지하자마자 이슬람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저질렀고 그 숫자는 십자군 측 기록에 의하면 최소 1만여 명, 이슬람측 기록에 따르면 최대 7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승전한 십자군은 점령지에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피아 영주국, 예루살렘 왕국 등, 여러 영주국과 왕국을 건설했다. 이 지역이 기독교 세력권이 되면서 유럽에서 수많은 이주민과 순례자들이 모여들며 대도시로 발전해나갔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권이었고 주민들과 순례자들을 위협하는 강도들이 들끓어 치안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 다양한 '십자군 기사단'이 창설되어 치안 유지에 나섰다. 그중에서도 흰 망토와 빨간 십자가로 상징되는 '템플기사단(성전기사단)'은 투철한 신앙심과 강력한 무력을 겸비하여 십자군을 대표하는 최정예 기사단이 됐다. 이들은 순례객들의 재산을 보호해주는 '어음'을 만들어 유럽 금융업의 시초로 불리기도 한다.
이밖에도 '튜턴 기사단'은 예루살렘의 독일기사단으로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를 새겨놓았으며 수도자들로 구성되어 이교도를 색출하고 예루살렘을 수호하는 임무을 맡았다. 성요한기사단은 로마 가톨릭에 속한 기사단으로 순례객과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구호 부대 역할을 맡았다. 십자군 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자격조건이 까다로웠고, 항상 몸상태를 청결하게 하고 체력관리에 힘써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강력한 기사단의 활약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도 성지를 빼앗긴 채로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슬람군은 에데사 백작령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위협하며 반격에 나섰다. 이에 서유럽도 다시 예루살렘을 보호하기 위하여 재차 십자군을 파병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서 파병한 십자군은 장거리원정에서 이슬람군에게 대부분 몰살되거나 전력을 크게 손실 당하며 2차 십자군전쟁(1147-1148)은 참혹한 실패로 끝난다.
여기에 이슬람 세력에 살라딘(1137-1193)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기독교 세력의 최대의 위협으로 등장한다. 살라딘은 1174년 현재의 이집트와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했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하면서 끝내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이 시대를 다룬 영화가 2005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다.
경악한 유럽에서는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잉글랜드에 파병을 요청하여 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남다른 용맹을 자랑하여 '사자심왕(Lion heart)'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십자군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전쟁 중 강에 빠져 사망했고, 잉글랜드와 앙숙이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중도에 철군하면서 리처드 1세만 남게 됐다. 살라딘과 협상에 돌입한 리처드 1세는 점령지역을 모두 반환하고 기독교인의 순례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한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전쟁을 멈추고 평화의 시대가 잠시 찾아왔다.
하지만 1202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다시 예루살렘 탈환을 위하여 십자군 파병을 촉구하면서 전쟁이 재개됐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하러 가기도 전에 보급난에 시달리던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결탁하고 같은 기독교 국가이던 자라를 침공하는 어이없는 사태를 저지른다. 애초에 정치적 목적으로 결정된 십자군은 성지탈환의 명분을 잊고 이권을 위한 '사설 용병'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이었다.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다가 체면만 구긴 인노첸시오 3세는 분노하여 십자군과 베네치아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정치적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교황은 십자군이 사절단을 보내 용서를 구하자 은근슬쩍 다시 파문을 철회했다.
하지만 4차 십자군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알렉시오스 4세와 계약을 맺고 이번엔 비잔티움을 침공한다. 천년 가까이 제 2의 로마이자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인의 손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십자군은 애초에 십자군의 기원이 비잔타움을 이교도의 침략에서 수호하자는 명분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교황의 통제에서 벗어난 십자군은 정복한 비잔티움의 영토에 라틴 제국 등 여러 왕국과 공국들을 건설하며 분열되었다. 결국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십자군은 결국 같은 기독교 국가들만 공략하고 이슬람 세력의 전쟁이나 성지탈환은 시작도 못한 채 와해되었다. 또한 십자군과 결탁한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해상강국으로 거듭나게 되며 추악한 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십자군 전쟁은 8차까지 이어졌지만 기독교 세력은 두 번 다시 예루살렘을 완전히 탈환하지 못했다. 유럽을 뒤흔든 대기근과 페스트(흑사병), 백년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인구가 죽어나가면서 유럽 사회는 이후 더 이상 성지탈환과 십자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을 잃었다. 1291년을 끝으로 십자군 원정은 완전히 막을 내린다.
또한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 교황의 권위와 왕권이 약화되고 상인들의 영향력이 향상되며 중세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서막이 되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가장 추악한 비극으로, 어떤 경우에도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반면교사'가 바로 십자군 전쟁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등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가톨릭의 대표적인 흑역사인 십자군 전쟁의 과오를 인정하고 속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전쟁의 역사는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참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요, 더욱 더 완전한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항구한 노력으로서 얻어지는 질서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어록은 종교와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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