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십니까, 흥행한 <서울의 봄>에 여자 안 보이는 이유

윤일희 2024. 1. 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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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계보학> (실라 미요시 야거, 2023, 나무연필) 서평

[윤일희 기자]

역사는 객관적 진실이기 어렵다. 역사를 기록하는 어떤 사관도 철저히 객관적일 수 없고, 그들이 어떤 사료를 선택하고 중시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첨예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역사를 발굴해 중요하게 다루느냐는 매우 정치적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살아야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의 입장에서 무엇을 중시해 역사를 기술할 것인가는 명확했을 것이다. 1880년에 태어나 조국인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착취와 탄압이 조선의 국민 됨을 침몰시키는 위기를 목격했을 그에게는 식민지에 저항하고 봉기할 불굴의 역사가 절실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유(잘못)를 발본색원해야 했다. 잘못을 찾아내 뜯어고치고 국민 됨을 갱신해야만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나라를 망하게 한 주체로 지목된 것은 '유약한 문신 양반'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붓대를 놀려 당쟁이나 일삼느라 나라의 안보엔 관심이 없었으니 국가가 온전할 리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나라를 지키려면 힘(군대)이 필요하고 국방엔 나약한 문신이 아니라 무신의 역량이 핵심이라는 무신 영웅 신화가 필요했다. 국난을 극복하고 하나 된 국민 됨을 재건할 군사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소도를 불러내고 을지문덕과 최영과 이순신의 영웅담을 구성했다. 유약한 유생들을 거세시키고 그 자리에 전쟁 영웅을 세우고 근대 민족 국가론를 구축했다. 만주를 호령하고 한반도를 통일했던 기개를 복원하고 새로운 전쟁 영웅들에게 새 조국의 명운을 걸었다.

박정희가 재발명한 신채호의 전쟁 영웅담  
 
 <애국의 계보학> 표지. 이 책의 서론은 '서론 민족주의와 젠더의 시선으로 본 한국사'다. 실라 미요시 야거(지은이), 정희진(기획), 조고은(옮긴이), 출판사 나무연필.
ⓒ 출판사 나무연필
 
이렇게 고안된 신채호의 전쟁 영웅담은 박정희에 의해 재발굴된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그에겐 이를 정당화할 신화가 필요했다. 무신 이순신이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처럼, 전쟁의 참화에서 나라를 구할 것은 군인이라는 신화를 각인시키기 위해 이순신의 전쟁 영웅성은 맞춤이었다.

자신의 정권 탈취를 혁명으로 미화시키고 무신 이순신을 성웅(聖雄)으로 만듦으로써 군인이 나라를 구했다는 구국론을 프로파간다 했다. 이순신의 위인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이순신 영화를 단체관람하며 자란 60년대 생인 내게 그가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영웅으로 마음에 새겨진 것은 필연이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곧이어 다른 군인에 의해 쿠데타가 벌어지고 또다시 정권을 탈취했다. 이는 어쩌다 보니 일어난 몇몇 권력욕이 과한 군인의 일탈이 아니다. 이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완결한 후 쓴 <국가와 혁명과 나>를 심장을 두근대며 읽으며 국가와 민족 재건을 위해 군인 혁명이 필연임을 내면화했다. 군인다움과 무력이 국가 권력의 근간이라는 군인 영웅주의가 군대 내 굳게 자리하고 있었고, 이에 프로파간다된 국민은 이를 승인했다.

<서울의 봄>이나 지금 상영되고 있는 이순신 마지막 시리즈 <노량>은 지금껏 유구히 이어온 역사적 프로파간다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결국 권력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승된 철저히 젠더화된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애국' 담론 아래 여성 지워온 유구한 역사 

"남자들의 종족 공동체"에서 여성의 자리는 없다. 영화 <노량>이나 <서울의 봄>에 여성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여성은 동 종족이 아닌 듯 취급되기 때문이다. 종족은 아니면서 종족의 정체성을 보다 완벽히 구성하기 위해 여성은 부수적으로 동원된다. 이를테면 영화 <노량>에서 여자(방씨부인)의 역할은 전쟁의 위험을 뚫고 먼 길을 와 지극정성으로 남편의 탕약을 대령하는 것이다.

<서울의 봄>에서 여자들은 남편의 안색을 살피고, 먹고 입을 것을 살뜰히 챙기고, 남편의 출세를 위해 술상을 마련하고, 혹은 남자들의 노고를 위무하기 위해 향락을 제공한다. 여자는 역사 속에서 철저히 남자에 의해 남자를 위해 존재했고 생사여탈 또한 남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지금껏 이어져 온 역사에 여자의 의미 있는 삶이나 역할, 공헌이 없을 리 없지만, 여자는 탈역사적 존재로 지워졌다.
 
 1000만 관객 돌파 소식이 알려진 영화 '서울의 봄',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영화관 모습.
ⓒ 연합뉴스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게 된 건 한국학과 아시아 역사학자인 실라 미요시 야거의 <애국의 계보학>을 읽으면서다. 그는 본래 인류학도였으나, 한국에 와 6월항쟁을 목격한 후 연구의 방향을 튼다. 그는 일제 식민지와 미 제국주의 통치를 통해 생성된 한국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젠더 이데올로기와 유교 서사가 강력히 결합되어 있고 이것이 근대국가 국민성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자명하게 받아들인 한국의 근대사로서의 항일 민족주의와 애국 이데올로기를 찬찬히 톺아보게 한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기 학교 다니며 전쟁 영웅 프로파간다를 내면화한 세대에겐 복기할 장면들이 많다. 익숙했던 남성 전쟁 영웅들의 서사가 범박한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또한 어째서 항일 민족주의자든 독립운동가든 여성들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는지 환기하게 된다.

영화 <암살>을 계기로 여성 독립운동가나 혁명가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전까지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유관순이었음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잠깐 이 책은 다루지 않지만, 신문 보도조차 나지 않던 무명의 유관순이 혁혁한 독립운동가로 등장한 모종의 기획을 살펴보자. 반론하는 이도 있지만, 이화학당의 미 선교사 장학생으로 입학했던 유관순이 독립운동가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친일파로 알려진 박인덕 등이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항 담론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유관순을 호명하던 방식이 독립운동가 유관순이 아닌 유관순 '누나'였다는 것은, 여성을 독립운동가로서도 온전한 운동가로 정체하지 못하고 '누나'라는 친근한 가족적 호칭으로 젠더화한 의도이자 결과였다. 여성을 단지 남성의 영웅됨을 완벽히 완성하기 위한 '현모양처, 애국 부인'으로 보조적으로 위치시킨 젠더화된 역사가 낳은 블랙코미디라 해야 하나.

다시 <애국의 계보학>으로 돌아와서, 저자는 신채호의 근대국가론과 이광수의 분열하는 식민지 남성성 탐구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기획된 젠더를 파헤친다. 이어 신채호의 군사영웅주의를 계승한 박정희가 이를 어떻게 활용해 애국적 지도자로 거듭나는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군부 독재에 저항했던 학생운동 담론조차 부성(父性)에 대한 애국 서사를 복제 재생하며 남성들의 역사 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해왔음을 밝힌다.

더 놀라운 것은 군사 민족주의에 기댄 국가의 정통성의 계보가 민주화 정권의 상징인 김대중 정부에게도 계승된다는 점이다. 마침 김대중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온 참이다. 그의 정치적 삶을 실라 미요시 야거가 제시하는 계보를 경유해 톺아보는 것도 의미심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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