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가오도, 돈도 없는 필수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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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을 일찍 정리하고 일곱 시쯤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가 대뜸 얘기한다.
"오늘은 다른 아빠들처럼 집에 일찍 들어왔네." "가끔 일찍 퇴근하잖아." "매일 열한 시에 들어오다가 어쩌다 열 시에 들어오는거?" 소아과 의사가 꿈인 둘째가 끼어든다.
'어떻게 남는 의사를 필수의료로 유입시킬까'가 아니라, '어떻게 환경을 개선해서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필수의료를 전공하게 할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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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을 일찍 정리하고 일곱 시쯤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가 대뜸 얘기한다. “오늘은 다른 아빠들처럼 집에 일찍 들어왔네.” “가끔 일찍 퇴근하잖아.” “매일 열한 시에 들어오다가 어쩌다 열 시에 들어오는거?” 소아과 의사가 꿈인 둘째가 끼어든다. “정말? 다른 아빠들은 이 시간에 집에 와? 난 의대 안 갈래!”
최근 의대 인기는 그야말로 광풍이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서 학생들이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2018년과 2022년의 결과를 비교했는데, 초등학생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14.7%에서 30.1%로 두 배 늘었다. ‘사회에 봉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의 비율은 뚝 떨어졌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다. 더 흥미로운 건 고등학생들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의 비율은 증가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라고 대답한 비율은 20%나 감소했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한번 해보겠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논의 중인 의대 증원의 효과를 예측하려면 이런 가치관의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필수의료 대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정부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의대 증원이다. 기대효과는 두 가지다. 첫째, 필수의료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의사 수가 늘면 필수의료를 지원하는 의사도 자연스럽게 증가할 거라는 기대다. 둘째, 의사 수 증가는 비급여, 미용, 비만 의료 시장을 레드오션으로 만들 것이고, 그 결과 남은 인력은 필수의료 분야로 유입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나는 나름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전공을 택했는데 졸지에 낙수과 의사가 됐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마음으로 버텼는데, 이제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는 상황이 됐다. 낙수과 교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 논의의 큰 문제점은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남는 의사를 필수의료로 유입시킬까’가 아니라, ‘어떻게 환경을 개선해서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필수의료를 전공하게 할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즉, 의대 정원이 얼마든지간에 필수의료 과목에 의사가 먼저 배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의대 정원이 지금과 비슷했던 20년 전에도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등 필수의료 분야는 정원을 채우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지금의 위기는 사회의 근로 기준과 가치관은 변하는데, 필수의료 근무 환경은 더 열악해진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5일제는 당연하고 주4일제까지 언급되는 시대다. 동기들과 며칠씩 집에 안 가고 당직실에서 동고동락하는 시대가 아니다. 병원만 20년 전 기준으로 일을 할 수는 없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패착은 대상자들이 그들의 의도를 따라줄 것이라고 믿는 데 있다. 천만에. 사람들은 정책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따르기보다는 그 정책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따라서 정책과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당장 현장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많은 학생이 여전히 선의를 지니고 있고 생명을 살리는 보람을 위해 경제적 보상을 뒤로하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의 의료 환경은 이런 선의를 소모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의대 증원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피안성(피부·안과·성형), 정재영(정형·재활·영상)이 아니라 내외산소가 인기과가 될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아무리 의사를 늘려도 지금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아마도 10년 뒤에 똑같은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 정원을 더 많이 늘렸어야 되는데.
고경남(서울아산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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