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주의 촌철生인] 도도상인가요, 만만상인가요?

2024. 1. 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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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뒤집혀도’ 평등 세상은 이뤄지지 않겠지만
좀 더 가까워질 꿈은 꾸어야

남자 모델 오디션 현장. 리포터가 오디션 참가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리포터의 질문, “오늘 오디션은 도도상인가요, 만만상인가요?” 그가 말한 도도상은 도도한 고급 브랜드, 만만상은 저렴한 브랜드를 의미했다. 오디션에 붙으면 명품을 걸치고 소비자를 내려다볼 수 있다며 남자 주인공 칼에게 도도상 표정을 요청하는 리포터. “고급 브랜드일수록 소비자를 내려다보거든요. 신분 상승하고 싶어? 그럼 돈을 많이 내. 이런 느낌이죠.” 그의 요청에 따라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칼. 리포터는 다시 주문한다. “자, 이번엔 저렴한 옷으로 갈아입었어요!” 그의 주문대로 저렴한 브랜드의 표정, 즉 친근하고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칼. “다시 도도상으로요! 강렬하게 얼음처럼 차갑게.” 리포터가 요구하는 대로 재차 표정과 자세를 바꾸는 칼과 모델 지망생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2022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 이야기다. 도도한 브랜드는 ‘감히 말을 걸어? 나와 다른 잡것들과는 상종하지 않겠어’라는 표정이라면, 만만 브랜드는 ‘피부색은 달라도 우리 함께 웃어요’라는 표정으로 우정이나 평등 같은 것을 말한다고 비꼰다. 생각해보니, 값비싼 패션 브랜드의 모델들은 정말 잘 웃지 않는다. 고급 브랜드를 구매하는 ‘상류계급’ 고객들이 대중을 향해 함부로 웃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힘을 주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상류계급의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풍파를 겪으며 힘겨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 있는 미간의 주름을 유럽 미용업계에서는 ‘슬픔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니, 이 또한 블랙 코미디 아닌가? 영화는 거꾸로 뒤집어져도 여전히 삼각형의 계급사회를 만들어내는 인간 사회에 대해 노골적으로 풍자한다.

영화에서 도도 브랜드로 언급된 패션 명품 발렌시아가는 올봄 컬렉션에서 특이한 제품을 선보였다. 이름하여 ‘발렌시아가 타월 스커트’. 검은 후드티를 입은 남자 모델이 양쪽 손은 상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헐렁한 카고팬츠 위에 누가 봐도 커다란 타월을 앞치마처럼 둘렀다. 도도 브랜드답게 얼굴엔 역시 웃음기가 없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 제품인 이 ‘타월 스커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그냥 타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내부에 길이 조절이 가능한 버클이 있는 제품으로 가격은 115만원. 이 제품이 회자된 것은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 때문이다. 단 9900원짜리 타월을 판매하며 발렌시아가를 패러디했다. 이케아 인스타그램에는 검은 후드 티와 카고팬츠를 입은 남자 모델이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발렌시아가와 다른 점은 한 손은 상의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이케아의 유명한 파란색 장바구니를 들었다. 이 사진 아래에는 ‘2024년 봄 패션 아이템’이라는 글을 달아놓았다. 가격으로 따지면 만만 브랜드에 속하는 이케아의 이 패러디 역시 호쾌한 블랙 코미디 아닌가?

영화 속에서는 칼이 탔던 초호화 유람선이 난파되고 승객과 직원 몇 명이 어느 해안가에 살아남는다. 바다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고 요리를 해서 먹을 것을 장만한 이는 화장실 청소담당이었던 유색인종의 여성. 그는 조난당한 갑부 승객들에게 먹을 것을 인색하게 나눠주며 되묻는다. “자, 이제 내가 누구라고요?” 세상이라는 유람선이 뒤집혀 ‘배에선 청소부’가 ‘여기에선 선장’이 되는 일은 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일어난다 해도 평등한 인간사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슬픔의 삼각형을 이마에 지닌 이들은 여전히 늘어나고, 백만원이 넘는 타월 스커트를 신선한 패션 아이템으로 구매할 수 있는 사람, 명품 휴지를 써야만 코가 잘 풀리는 이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좀 평등해지길 꿈꾸는 걸 올해도 멈출 수는 없다. 최소한 법 앞에 평등이라도.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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