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비평은 기행 아닌 작품의 조형 형식이 우선”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이 인기몰이 중이다. 지난해 9월 14일 개막해 약 석 달을 넘긴 지난 7일 현재 19만4000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관람객은 내달 12일 폐막일까지 20만명을 훌쩍 넘어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전시에 대한 감동이 화가 장욱진(1917∼1990)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했는지 도록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과거에 가족과 제자들이 쓴 장욱진 관련 책까지 들썩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정영목(70) 서울대 명예교수가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소요서가·사진)을 내 장욱진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주고 있다. 정 교수를 세밑 덕수궁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정 교수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미술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 후에는 숙명여대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가르쳤고, 서울대미술관장, 서양미술사학회회장, 한국미술이론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정 교수는 “언제까지 화가 장욱진을 ‘술을 많이 마신다. 기인적인 풍모가 있다’는 식의 일화나 인상 비평, 감상 비평 안에 가둘 것인가”라며 “이제 장욱진을 말할 때 조형 형식에 대한 비평을 통해 장욱진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위치와 작품이 갖는 형식적인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책에 대해서는 형식주의 방법론으로 다시 쓰는 장욱진론, 형식주의 방법론으로 쓴 한국근현대미술사라고 정의했다.
평론을 하는 미술사학자가 쓴 책이니 딱딱하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체는 쉽고 간결하다. 내용은 명료하다. 한국의 미술비평계가 작품을 분석할 때 관성처럼 걸치는 들뢰즈나 데리다 같은 서양의 철학자 이름, 머리 아픈 미학이론은 언급되지 않는다.
정 교수는 화가 장욱진을 ‘한국적 모더니스트’라 규정하면서 “장욱진은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전통적인 것에 관한 내부의 영향, 다른 하나는 신교육을 통한 서구의 모더니즘 사상에 관한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책을 쓴 계기를 물었더니 장욱진과의 인연을 풀어놓았다. 시작은 미국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무렵이다. 대학원 수업 때 조나단 파인버그 교수가 ‘너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 작가에 대해 발표하라’고 주문해 이중섭과 장욱진 등에 대해 발표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는 “이중섭의 그림이 야수주의·표현주의적이라면 장욱진은 그림에 그래픽적인 요소, 만화 같은 느낌이 있는 등 시각적으로 독특하게 들어왔다. (산과 집, 나무 등) 이미지를 반추상적인 이미지로 추려내는 게 간결하면서 힘이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그가 장욱진 자료를 뒤적이는 걸 본 아내(이승신 전 건국대교수)가 “어, 내 친구 아버진데…”하더란다. 아내는 장욱진의 막내딸 장윤미씨와 경기여고 동기였고 대학로 자택에도 자주 놀러갈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귀국 후 평론 활동을 활발히 하던 그에게 장욱진미술재단은 1999년 호암미술관에서 하던 장욱진 개인전 서문을 써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화가 장욱진 연구 인연이 본격화되면서 글을 자주 쓰게 됐고, 이번에 한권의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이다.
이 책에서도 지방의 명문가 자손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했고, 부친이 시서화에 안목을 지녀 그림을 즐겨 그린 덕분에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장욱진의 인생사가 나온다. 하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아주 간단하게 언급될 뿐이다. 정 교수는 장욱진을 ‘맑은 성정의 소유자’로 평가하지만 신화화하지 않는다. 대신 조형 형식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통해 미술사에 정확히 위치시키고자 한다.
그는 한국적 모더니스트로서 장욱진의 자질은 일본 유학 시절에 그린 ‘소녀’(1939)와 해방 이후 그린 ‘독’(1949)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장욱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재현)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형화하는 등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모더니스트로서 기질을 이 두 그림에서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두 그림에는 한국인 작가로서의 정체성까지 녹아 있다고 했다. ‘소녀’는 당시 일본 화단에서 성행하던 서구 화풍의 영향이 전혀 없이 주인공 소녀를 화면 가득 가분수 형태로 채웠다. ‘독’ 역시 원근법을 무시한 채 화면을 꽉 메우게 그리는 등 그 자체로서 심리학적 상징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한국적 정체성을 살린답시고 문제의식 없이 전통적인 소재를 열거하는 식의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생명력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후 그린 ‘모기장’(1956)도 ‘독’과 마찬가지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간결한 사각형 구도의 단칸방 집에 모기장을 치고 누워 있는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렸다. 이들 그림은 서구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유아의 표현 방식을 빌려 의도적으로 정확하게 측면에서의 시점과 공중에서의 시점을 하나의 평면에 모아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추상에 관한 한국 현대미술계의 해석은 지나치게 서구 추상미술의 진행 범위 내에서 파악되는 경향이 있다”고 문제제기하면서 “‘추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서구식 개념의 추상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회화에서 있어왔다”고 말했다. 그 예로 조선 후기 문인화가 강세황이 그린 ‘영통동구도’를 들었다. 그는 장욱진을 굳이 서양 작가와 비교하자면 파울 클레나 호안 미로보다는 유아나 자폐아 등의 순수한 표현을 그림에 적용한 장 드뷔페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장욱진의 그림은 정말 작다. 작게는 엽서 크기에서부터 크게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30∼40㎝를 넘어가지 않는다. 정 교수는 “하지만 작은 그림이라도 인간의 상상력에 따라 우주가 될 수 있다”면서 “장욱진은 그 작은 프레임을 치밀하게 운용함으로써 우주 같은 큰 그림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우주 같은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장욱진이 구사한 조형방식을 5가지로 분류했다. 화면을 꽉 채운 네모 형태나 이것의 변형, 삼각형, 수평형, 수직형, 사선형 등이 그것이다.
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작가의 생애나 에피소드에 기대 작품을 소비하는 태도에 우려를 표했다. 작품을 보지 않고 사생활, 유명세 등 작가의 스토리만 보게 되면 유명세가 갖는 사회적 권위, 화랑과의 관계 등 작품성과 관련이 없는 요인에 따른 거품 가격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구자들 역시 작품에 대한 형식주의적 비평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형식에 대한 분석이 약하면 시각예술 분석에 뼈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그림에 대한 실체를 잘 몰라 모방을 해도 모르게 된다. 또 작가가 자기 작품을 재탕하거나 약간 손질하면서 형식 이외의 것으로 부풀려서 내도 모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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