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아들이 딱 하나, 들어주기 어려운 소원을 빌었다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 지난 기사 '아들과 여행하다가 이런 행운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벌어진 일'에서 이어집니다.
프랑스에서 갑자기 난 차 사고
스위스에서 나와 프랑스 남동부의 작은 도시 콜마르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한 숙소는 프랑스의 평범한 3층짜리 주택이었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우리는 여행 얘기와 함께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갔다.
"아빠, 여기 와이파이가 안돼."
여행하며 숙소를 고를 땐 와이파이를 최우선 조건으로 찾는데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된다기에 서둘러 확인해 보니 연결 신호가 약해서 자꾸 끊어지는 것 같았다. 2층에 있는 거실로 내려가 주인분에게 와이파이 신호가 약하다고 말하니 영어를 잘 몰라서 인지 자기는 잘 된다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 프랑스 콜마르 숙소 프랑스 시골 주택이지만 최신형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다 |
ⓒ 오영식 |
와이파이도 잘 안되고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 답답했던 우리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왔다. 그런데 시동을 켜고 후진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드르륵' 소리에 당황해 차를 세웠다. 바로 차에서 내려 확인해 보니 급한 마음에 내비게이션 검색을 하며 후진하다 열어놓은 대문에 차 뒤편이 부딪히고 말았다. 차와 대문이 모두 페인트가 벗겨질 정도로 살짝 부딪혔지만, 하필이면 자동문이어서 모터가 고장이 난 건 아닌지 걱정이 돼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내외분은 모두 외부에 나가 숙소에는 '도미니크'란 이름의 장기 숙박 손님만 있었다. 도미니크에게 주인 연락처를 아는지 물었더니, 전화번호를 안다며 전화해주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차를 다시 주차하고 숙소 거실에 앉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다 정오 무렵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았고, 금방 숙소로 오셨다. 벌써 오후 1시가 다 되어가 마음이 급한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빨리 보험처리를 하려는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 네…."
▲ 알자스 전통 수프를 먹는 아들 사고가 났지만 프랑스 신사는 식사를 먼저 하자고 하셨다 |
ⓒ 오영식 |
빨리 보험처리를 하고 이동하려던 우리는 졸지에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전통 수프에 커피까지 아주 느긋하게 마셨다. 그리고 보험처리를 하려 러시아 국경을 나와 보험에 가입했던 라트비아 보험회사에 전화하자, 직원은 영어를 못한다며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인터넷으로 지점을 조회해 보니 라트비아 말고도 프랑스 파리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지점이 있어 파리 지점에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인 할아버지가 독일어를 할 수 있으니 프랑크푸르트에 전화해보자 했지만, 인터넷에 나온 번호는 잘못된 전화번호였다. 검색 능력 강국인 대한민국 직장인의 능력을 발휘해 느린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검색해 프랑크푸르트 지점 전화번호를 다시 찾아내 전화했고, 주인 할아버지가 독일어로 통화해 간신히 보험처리를 할 수 있었다. 전화통화 뒤 할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자, 이제 다 됐습니다. 제가 당신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군요."
"아닙니다. 제가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의 휴가를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어서 출발하세요."
"감사합니다. 혹시 보험처리가 잘 안되거나 하면 제 번호로 연락해주세요."
할아버지는 우리가 숙소에서 차를 빼고 출발하려는 데 옆으로 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해주셨다.
"항상 '빨리빨리'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들키고 만 아들의 속마음
▲ 룩셈부르크 크리스마스 시장의 트램펄린 아들은 아돌프 다리보다 트램펄린을 더 좋아했다 |
ⓒ 오영식 |
어린 아들에게는 룩셈부르크의 상징과도 같은 아돌프 다리와 오래된 건축물, 크리스마스 시장의 아름다움보다 작고 시시해 보이는 놀이 기구가 더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걸 보니 '우리 아들 아직도 많이 어리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여행을 출발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 지쳐있을 아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 물었다.
"태풍아, 너 태희라고 알지? 진태희."
"응? 걔가 누구야?"
"우리 바닷가 같이 놀러 갔던, 너보다 한 살 어린 동생 있잖아. 아빠 친구 대경이 삼촌 아들."
"아~ 그때 조개 잡고 한밤 같이 잤던 애."
"그래~"
"노래방에서 노래도 같이 불렀던 애."
"그래. 걔가 태풍이 많이 부러워한대. 우리 유튜브도 매일 보고, 자기도 여행하고 싶다고."
아들에게 힘을 주려고 한 말인데, 아들은 여기에 마치 하소연하듯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에이~ 아빠, 걔는 아직 어려서 그래 여행이 얼마나 힘든데."
"하하. 그래 걔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그럼, 아직 어린애가 뭘 알겠어. 여행하려면 차도 많이 타고, 많이 걸어야 하고, 응? 또 떡볶이랑 양념치킨도 못 먹고 인터넷도 느리고 얼마나 힘든데. 그건 걔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하하하!"
전혀 예상치 못한 어른스러운 대답에 실소가 나왔다가도, 그동안 여행하며 살짝 보인 아들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은 한 번씩 '그만 한국에 갔으면 좋겠다'라는 표현을 아주 살짝씩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여행이 짧아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데서 속마음이 나온 걸 보고는 귀여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흔히들 '독박육아'라며 혼자 아이 보는 걸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우리 부자는 원래도 아들이 학교에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그리워할 정도로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이번 여행도 하루 종일 함께 보내고 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과 달리 아들은 여행하며 힘든 순간이 있어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아빠랑 있으니 묵묵히 따라온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미안했다.
▲ 룩셈부르크의 아돌프 다리 1903년 룩셈부르크에 건축된 42m의 다리로 저녁놀이 아름답다 |
ⓒ 오영식 |
▲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송창주 관장님 내외분과 우연히 만난 유튜버 '구름길'님 부부와 함께 |
ⓒ 오영식 |
기념관 맞은편에 주차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옛날에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이건 잘못된 거예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아 갔어요.'라고 다른 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여기에 한국 사람이 왔었는데. 그분이 여기서 돌아가셨어."
"왜? 그분은 성공했어?"
"아니, 일본이 방해해서 실패했는데, 여기서 돌아가셔서 그분 유물이 보관돼있데."
▲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아들은 태극기를 들고 있으니까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
ⓒ 오영식 |
당시 헤이그 특사의 이동 경로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육로로 시베리아를 지나온 우리 경로와 비슷하기도 하고 해 아들에게 보여주려 구석구석 둘러봤다. 우리 여행 얘기를 들으신 송창주 관장님께서는 컵라면과 먹을 걸 챙겨주시며 아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10년 전 여기에 와서 방명록을 남긴 적이 있다는 얘길 들으시곤 10년 전 방명록을 갖다주셨다. 정말 10년 전에 내가 남긴 방명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들에게 보여줬다.
"태풍아, 이거 아빠가 여기 10년 전에 와서 기록한 건데 진짜 남아있다. 신기하지?"
"와~ 진짜? 신기하다."
"아빠가 그때 여기 기록하면서 다짐했거든. '나중에 아들이나 딸이 생기면 꼭 한 번 같이 와야지'하고. 근데 진짜 이뤄졌다? 이거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 책인가 봐."
"아빠, 나도 여기에 쓸래."
"왜? 너도 소원 빌고 싶은 거 있어?"
아들은 내가 들리지 않게 혼자 중얼거리며 방명록에 기록했다.
무슨 소원이 있는지 물었지만, 아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가 못 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몇 걸음 떨어져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 이준 열사 기념관 방명록 아들은 소감을 기록하고 소원을 빌었다 |
ⓒ 오영식 |
평소에는 아빠랑 단둘이 지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만나서 자고 오는 우리 아들은 설명을 자주 해줘도 아직 어려서인지 '헤어짐'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가 자기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자기가 말하면 아빠랑 엄마는 뭐든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도 갖고 있다.
그래서 아들은 소원이라고 말하면 '아빠랑 엄마랑 다시 같이 살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태풍아.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랑 엄마가 널 사랑하는 건 영원히 변치 않을 거야.'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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