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승자' 베켄바워, 20세기 전설의 퇴장

이준목 2024. 1. 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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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의 전설 베켄바워 별세, 향년 78세... 말년 사생활 등으로 우여곡절

[이준목 기자]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Der Starke gewinnt nicht, derjenige der gewinnt ist stark.)"

아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반드시 들어봤을 유명한 격언이다. 주로 스포츠에서 많이 쓰이지만 인생에 적용해도 공감을 자아내는 세기의 명언이기도 하다.

이 유명한 어록의 원조는 바로 독일 축구의 전설로 불리우는 '카이저' 프란츠 안톤 베켄바워(1945-2024) 바이에른 뮌헨 명예회장이다.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이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후 베켄바워는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평생의 라이벌이던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 한 문장의 어록으로 '축구와 승부의 본질'을 정리하며 멋지게 응수한 바 있다.

베켄바워가 지난 1월 8일(한국시간) 향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베켄바워의 유족들은 DPA 통신 등을 통하여 "베켄바워 회장이 전날 평화롭게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베켄바워는 독일이 배출한 역대 최고의 축구 영웅이자, 펠레-디에고 마라도나-크루이프 등과 더불어 20세기 축구의 아이콘과 같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전설들보다도 베켄바워만의 가장 독보적인 부분은, 선수로서는 물론이고 감독과 행정가로서도 모두 최정점의 자리까지 오른 '인생의 승리자'였다는 사실이다.

베켄바워는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했던 1945년, 연합군 점령 치하에 있던 뮌헨에서 태어났다. 독일이 암울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다시 유럽의 중심국가로 부흥하던 시기를 축구를 통하여 상징하는 선수가 바로 베켄바워였다. 13살 때인 1958년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하며 축구를 시작했다. 이 당시만 해도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 속해 있었으나 베켄바워의 1군 데뷔 시기와 동시에 1부 리그로 승격하며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베켄바워는 1960-70년대 바이에른을 대표하는 미드필더겸 수비수로 활약하며, 공격수 게르트 뮐러-골키퍼에 제프 마이어 등 위대한 레전드들과 함께 바이에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베켄바워가 선수로 뛰었던 1977년까지 바이에른은 4회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유럽챔피언스리그의 전신) 3연패(1974~76년)을 달성하며 유럽축구를 대표하는 명문팀으로 올라섰다.

또한 베켄바워는 독일(서독)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A매치 103경기에 출전하여 14골을 넣었고, 1974년 자국에서 열린 서독월드컵에서는 우승까지 이끌었다. 1972년과 1976년에는 수비수로서 발롱도르도 2회나 수상했다. 베켄바워는 남다른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바이에른과 독일대표팀에서 모두 주장을 맡았다. 주포지션은 센터백이었지만 공격과 빌드업에도 적극 가담하는 '리베로(Libero)'의 개념을 정립시킨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꼽힌다.

바이에른과 독일을 떠난 1977년에는 미국 코스모스 뉴욕에 입단하여 동시대를 풍미한 브라질의 축구 황제 펠레와 함께 뛰기도 했다. 1982년에는 고국 독일 무대에 복귀해 함부르크 SV에서 또 한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했다. 현역 시절 베켄바워는 소속팀과 대표팀을 아울러 자신이 몸담았던 모든 팀에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축구인생에서 선수 시절은 겨우 1막이 끝난 것에 불과했다. 베켄바워는 은퇴후 지도자 경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모국인 서독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베켄바워의 서독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준우승, 유로 1988 4강에 이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베켄바워는 브라질의 마리오 자갈루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1990년에는 프랑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해 1부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93년에는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의 사령탑으로 금의환향하여 분데스리가와 UEFA컵 우승을 한번씩 차지했다. 

베켄바워는 1994년부터 바이에른의 회장을 맡았고, 1996년 임시 감독으로 UEFA컵 우승을 이끈 것을 끝으로 지도자 경력을 완전히 마감한 이후에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1998년에는 독일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2006년 자국에서 열린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월드컵 유치와 개최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베켄바워는 스타플레이어출신이 지도자나 행정가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스포츠계 속설의 완벽한 반례로 거론되며, 선수-감독-행정가 세 부문에서 모두 최고의 성과를 올렸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그와 함께 20세기 축구계를 풍미했던 펠레나 마라도나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베켄바워와 비슷한 사례로는 동시대에 라이벌로 꼽혔던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가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비교대상이 될 만하다. 하지만 크루이프조차 전술가로서 현대축구에 남긴 업적을 제외하면, 축구인으로서의 전반적인 커리어는 베켄바워가 확고한 우위에 있다. 베켄바워는 월드컵 결승전에서 바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맞대결하여 승리하기도 했다. 반면 크루이프와 네덜란드는 끝내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두 사람은 펠레 VS 마라도나, 메시 VS 호날두 등과 더불어 지금까지 축구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로 회자되고 있지만, 앞의 두 사례와는 달리 사적으로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2016년 크루이프가 사망하자 베켄바워는 "큰 충격 받았다. 크루이프는 내게 좋은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와도 같았다"며 진심으로 애도하기도 했다.

베켄바워의 선수 시절에 독일에서 활동했던 한국축구의 전설 '차붐' 차범근과의 친분도 유명하다. 베켄바워는 차범근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고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다. 두 사람은 은퇴후에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가 2010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셀틱FC로 이적할 당시 영국 내무성에 제출한 취업비자 추천서를 베켄바워가 써준 것도 유명한 일화다.

차범근 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베켄바워에 대하여 "품이 큰 사람이다. 모두에게 한결같이 친절하고 따뜻했다. 아쉬운 일이 있어 부탁을 했을 때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는다. 축구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하는 그의 성품 덕분"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승리자였던 베켄바워도 사생활과 말년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반복된 불륜과 혼외자 문제 등으로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겪었다. 2015년에는 2006독일 월드컵 유치를 둘러싸고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들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의혹으로 스위스 검찰의 수사와 재판을 받았으며 본인도 간접적으로 사실상 이를 시인했으나 2020년 공소시효 만료로 법적처벌은 면했다.

DPA통신은 "베켄바워는 현역 시절 우아함과 경쾌함으로 리베로의 역할을 재정의했다"고 평가했으며, 독일 축구전문지 키커는 "베켄바워는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고 자국의 축구영웅을 추모했다.

베켄바워의 별세로 펠레-마라도나-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요한 크루이프 등 20세기 세계축구계를 대표하던 전설들은 어느덧 모두 하늘의 별이 됐다. 훗날의 역사는 베켄바워를 축구사상 가장 완벽했던 승자로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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