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대놓고 수업을 평가합니다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안녕하세요. 고산고 1학년 2반 학생 김00입니다. (중략) 오늘 저희는 이 자리를 통해 우리 학교 교육과정이 과연 정말 잘 되고 있는 것인지 토의하고 판단하는 시간 을 가질 것입니다. 이 원탁토의의 결론이 만약 '우리 학교 교육과정은 잘 운영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나온다면 저희는 우리 학교 교육과정의 대대적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학교의 철학은 나를 사랑하고 더불어 행복한 민주시민교육입니다. 민주시민교육, 우리들이 불만을 느꼈던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요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지 않을까요? 따라서 민주시민으로서 눈치보느라 마음속에 깊이 박아둔 불만을 오늘 모두 격렬하게 터뜨리셔도 좋고 우리 학교 교육과정을 변호하고 싶어하는 인자한 마음씨를 보유하신 분들도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와 주장을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또 민주적인 태도, 경청하는 태도도 필수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각 과목 선생님들께 전달되기 때문에 과목이나 수업에 관한 것이 아닌 , 선생님들을 비난하는 내용은 삼가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인용 단락은 1월 5일 오전 본교 대강당에서 이루어진 전교생 원탁토의의 발제문이다. 다름 아닌 1학년 학생이 동기와 선배들을 앞에 두고, 심지어 다수의 교사가 함께하고 있는 자리에서 던진 서슬 퍼런 낭독이었다. 120명 남짓의 교사와 학생은 너나 할 것 없이 강당에 울려퍼진 한 학생의 긴장 어린 목소리에 모두 숨을 죽였다.
▲ 원탁토의 각 주제를 가진 원탁에서 학년이 섞인 채로 토의를 시작하고 있다. |
ⓒ 안사을 |
이 원탁토의는 현재 학생자치안전부장(약칭 학생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교사의 제안이었다. 과거에는 몽둥이와 기세로 학생을 제압하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학생주임의 자리였지만 현재는 학생들이 생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자치력을 키워주는 업무를 주로 한다. 그래서 많은 학교에서 보직 명칭을 '인성인권부장'으로 순화하기도 했다.
나 또한 여러 해 같은 업무를 해왔다. 특히 대안교육과 미래교육을 주창하는 본교에서는 그 역할에 대한 고심이 컸다. 학생회 아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학생 자치란, 학교 폭력 예방을 비롯하여 궁극적으로 교육과정까지도 포함한 개념입니다."
벤다이어그램을 그려가며 설명하는 나에게 많은 학생이 긍정의 눈빛을 보내온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는 바쁘다는 핑계와 서툰 경력으로, 모난 아이들을 둥글게 만드는 데에 급급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집단을 정화하고 교육과정과 학교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면은 아련한 상상으로 남은 채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교사와 학생이 함께 모여 원탁에 둘러앉아 수업에 대해 가감 없이 비판하는 자리가 마련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한층 성장한 아이들이 대견했다. 이런 모습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작은 전쟁들을 치러야 했던 담당 교사의 노고는 또 어떠한가.
아이들이 수업에 대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데에는 우리 공동체가 충분히 안전하다는 느낌이 한몫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수업에 대해 비판의 말을 토해내도 해당 선생님이 발끈하거나 학생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 설명 학생부장 교사가 원탁토의의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 안사을 |
원탁의 개수는 총 14개였다. 12개는 학생 원탁으로 학년을 고루 배치했다. 선배와 후배가 함께 서로 다른 경험을 나누게 되면 토의가 더욱 깊어질 것으 생각했을 것이다. 두 개는 교사 원탁이었다. 학생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주제였다. 1년간 자신의 수업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는 자리였다.
학생 원탁은 각각 수업을 세분화해서 나누었다. 대안 교과로 구분되는 노작, 낭독, 뮤지컬, 발상과 표현 등과 일반 교과로 구분되는 국영수사과 등이 12개 모둠으로 나누어졌다. 창체 동아리와 자율 동아리도 원탁의 주제에 포함되었다.
▲ 교사 원탁 자신의 수업에 대해 나누기 위해 구상 중 |
ⓒ 안사을 |
▲ 학생 모둠 토의와 동시에, 발표를 위해 벽보를 만들고 있는 학생들 |
ⓒ 안사을 |
한 시간 반 정도 각 원탁별로 토의 및 자료 제작이 이루어졌다. 평소 이런 방식의 수업에 익숙한 아이들은 별다른 질문 없이 2절지에 자기 모둠의 생각을 잘 정리했다. 나머지 한 시간 반 동안에는 모둠별로 결과물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졌다. 교사로서 떨리는 순간이었다. 과연 아이들은 모두의 앞에서 수업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보물찾기'이다. 인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었는데 찾아가는 과정이 보물찾기 같았다.
- '공사중'이다. 아직 미완성인 대안교육이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다른 공부'이다.
- '신념'이다.
- '가능성'이다. 나에게 여러 길을 열어주었다.
- '줄넘기'이다. 각자 능력이 다르지만 모두가 할 수 있고, 할수록 늘기 때문이다.
각각의 단어가 하나의 시어 같았다. 함축적으로 만들어낸 단어를 발표자가 말할 때마다 아이들과 교사들은 감탄의 환호성을 저절로 뱉어냈다. 날카로운 비판에 앞서 우리의 교육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1년의 세월을 보람있게 보낸 아이들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발표는 민감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사 모둠에 자리한 교사가 담당하는 교과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고, 발표를 듣는 동료 교사들의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 뮤지컬 수업이 한국사 수업과 연결된다는 점과 역사에 관련된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좋지만 안사을 선생님 혼자 정하지 말고 학생들이 직접 알아보고 조사해서 주제를 정했으면 좋겠다.
- 한 사람이 뮤지컬 곡을 모두 창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알지만 1학기는 너무 흐지부지 보내고 2학기 끝자락에 급급하게 녹음과 연습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시간 분배를 좀 더 고민하고 잘했으면 좋겠다.
급급하다니. 학생이 교사에게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인가. 어느 학교에서 이런 말들이 공개적으로 오고 갈 수 있을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의 진심이다. 위 내용을 발표하는 학생은 사뭇 진지했지만 발표 내내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의 태도가 참 고마웠다.
새 학기가 되면 위 의견을 그대로 인쇄해서 아이들과 첫 수업 시간에 함께 토론해 볼 생각이다. 내 머릿속엔 당연히 타당한 반박들이 이미 있지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누가 옳은가'보다 '함께 이야기하며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학생과 선생님이 소통이 안 된다. 회의도 빨리 끝낼 수 있는 것을 오래 끌어간다. 학급 자치 때 학생이 주도해야하는데 자꾸 선생님들이 관여를 한다.
- 선생님 간의 차별이 많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있기도 한 것 같다. 성적에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의견이 선생님에게 전달이 된다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곳에 공개하지 못한 내용 중에는 각 과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제안이 많았다. 담당 교사가 본다면 한편으로는 뜨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개선해나가고자 노력하고픈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물론 아이들이 얕게 판단하여 잘못 지적한 부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다면 그 역시 알찬 수업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본 토의를 기획한 교사는 결과물을 모두 수합하여 전 교원에게 배포할 것을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개선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가 실제로 교사들에게 전달되고, 다음 단계로서의 논의의 장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만큼 아이들에게 효율적인 민주시민교육이 또 있을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과정을 기획하고 아이들의 비판을 고스란히 교사들에게 전달한 젊은 교사를 과연 미워할 것인가? 장담하건대 아닐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듯 공립형 대안학교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날 선 토론과 발전을 위한 몸부림으로 이미 잔뼈가 굵은 우리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가장 민감한 주제에 대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했다는 것만으로 오히려 칭찬해 마지않을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앞두고
이번 원탁토의에 참여하며 무릎을 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고교학점제의 내실화에 관한 것이다. 현재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나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이미 고교학점제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학교들이 많다. 본교는 내년이 되면 교육과정의 구성과 시행 모두 고교학점제의 시스템으로 전면 운영해야 한다.
▲ 고교학점제 고교학점제 홈페이지에서 캡처 |
ⓒ 고교학점제 홈페이지에서 캡처 |
고교학점제는 '교과목 선택'이라는 특징 외에도 해당 과목의 성취 수준 및 수업 시수에 도달해야만 이수가 되는 점 등 현재의 교육과정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 운동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학생의 평가에서도 지금처럼 상대평가에 의존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다양하고 유익한 교과목의 개발 또한 교사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역량이다.
한때 교원평가에 대해 교원 단체 등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강하게 낸 적이 있다. 진정한 평가보다는 인신공격 위주의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되는 현실에 마음 아프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수업에 대해 원탁토의를 해보니, 교사 개인에 대한 평가는 위험하지만 수업에 대한 평가는 참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수업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교사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수업을 받는 학생에게는 당연한 권리이다. 각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 원탁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강한 토론은 그 자체로서도 교육적이지만 결과물 또한 참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교사가 새롭게 만들어 낸 교과목, 다양한 교육 자료를 재구성한 효율적인 콘텐츠를 통해 흥미 있는 수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제도이다. 거기에 더하여 학생과 함께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찾아낸 개선점을 누적하여 적용한다면 더욱 나은 수업이 될 것이고 새로운 교과목의 탄생까지 기대할 수 있다.
더 이상 학생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수업을 기꺼이 공개하며 학생들의 비판을 달게 듣는 교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오해로 비롯된 잘못된 비판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더욱 교육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교육언론 창>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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