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 출신의 통큰 자선사업가 김만덕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후기 '현군 밑에 명재상'의 말을 듣는 채제공이 그의 행적 <만덕전(萬德傳)>을 지었고,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에 관해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자로다
60의 얼굴인데도 40쯤으로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서 기민을 구하였고
한 번 바다 건너 임금 계신 궁궐을 뵈었네
다만 금강산을 한 번 보기를 소원하였으니
산은 동북쪽에 연무가 자욱하네
임금이 하사하신 날쌘 역마는
천리에 빛나고 강산이 요동쳤네
높이 올라 바라보니 심목이 장하고
표연히 손을 흔들며 바다건너 돌아가네
탐라는 예로부터 고량부가 살고 있는 곳
여자로서 이제 비로소 임금 계신 서울을 구경하였네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를 따옥새가 떠나갈 듯하고
높은 풍도는 온 세상에 풍기어 오래 머물겠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 남김이 이와 같으니
여자의 품은 맑은 뜻이 이보다 족함이 어찌 있으랴.(김봉옥, <김만덕>, <한국인의 원형을 찾아서>)
김만덕은 영조 15년(1739년) 제주에서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1녀로 태어났다. 양반도 상민도 아닌 보통백성의 집안이었다. 열한 살 때에 육지에 장사를 나가던 아버지가 풍랑으로 목숨을 잃고 얼마 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두 오라비는 친척 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퇴기 월중선의 집에 의탁하였다. 만덕이 출중한 용모와 영리하고 부지런하여 수양딸로 삼은 것이다.
몇 해가 지나는 사이에 만덕은 아리따운 처녀로 성장했고 틈틈이 어깨너머로 익힌 거문고와 가무도 능숙하였으므로 뭇 남자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고, 그 이름이 주위 사람의 입에 오르게 되었다. 만덕이 18살 되던 해, 기녀 수양모는 갖가지 유혹으로 기적에 올리니 만덕은 본의 아니게 기역(妓役)에 종사하게 되었다.(앞의 책)
송아지를 우물가로 끌고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순 없다는 말이 있듯이, 만덕은 어찌하여 기역에 들었지만 기녀 노릇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지키면서 두 오라비와 돌아가신 부모를 욕되게 할 수 없다고 다짐하였다.
스물세 살일 때 관가에 찾아 가서 기적에서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사와 판관에게 진정하는 글을 지었다.
소녀는 본시 양가의 출신이온데 지난 경오년에 부모님이 역병으로 돌아가신 후 의지할 곳이 없어 기녀의 집에 수양딸로 의탁한 바가 되어서 그 까닭으로 기적에 등재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양가의 딸이 기생이 될 수도 없거니와 조상에 대해서도 죄를 지었습니다.
사또께서 소녀의 불쌍함을 헤아리시고 기적에서 제명하여 양녀로 돌려주신다면 소녀는 친가로 돌아가서 정성을 다하여 친가를 재건하고 조상님께 속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힘이 있다면 소녀와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습니다. 하혜와 같은 사또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아니하여 결초보은하겠습니다.(<탐라기>)
눈물로 호소한 진정서는 사또를 움직였다. 아귀의 소굴에서 풀려난 김만덕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오라비들에게 토지를 사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객주집을 차렸다. 육지 상인들로부터 옷감·장신구·화장품 등과 제주 토산품인 미역·전복·표고·말총 등과 물물교환 하였다.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그의 객주집은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많은 돈을 모았다.
정조 16년부터 제주에 흉년이 들었다. 조정에서는 구호곡을 내려 보냈으나 풍랑을 당해 바닷속에 빠뜨리는 등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흉년은 4년 동안 계속되었다.
만덕은 그동안 모은 재산을 털어 도민들의 구호에 나섰다. 그리고 큰 배를 구입하여 육지에 가서 양곡을 되는대로 사오도록 하여 흉년과 질병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이런 소식은 제주목사의 장계로 조정에 알려지고 정조에게 보고되었다. 임금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여성이 해낸 것이다.
정조는 제주목사를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었다. 이런 경우 대개 가족에게 벼슬이나 포상금을 원하는데, 당찬 그는 금강산 구경을 제안하였다. 정조가 입궐을 명하면서 상경하는 데 역마 등 편의를 제공하라고 명하고, 며칠 후 편전에서 김만덕을 만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금강산 구경에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 KBS1 드라마 <거상 김만덕>. |
ⓒ KBS |
김만덕은 1812년 1월 22일 74살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사후 제주도에서는 만덕관을 건립하여 그의 정신을 기리고 만덕상을 제정하여 매년 10월에 열리는 한라문화제 때, 근검절약으로 역병을 이겨내고 사회를 위해 공헌한 모범 여성에게 수여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의 <재탐라기 만덕소득진신대부증별시권>에서 김만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만덕에게는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이 있다. 기생에 적을 두고서 과부로 수절했으니 한 가지 기특함이요, 많은 재산을 즐거히 베풀었으니 두 가지 기특함이요, 섬에 살면서 산을 좋아했으니 세 가지 기특함이다.
여자로서 겹눈동자를 지녔고, 종이면서 역마를 타고 불러왔고, 기생이면서 중으로 하여금 가마를 매게 했고 외진 섬에서 내전의 총애를 받았으니 이 모두 세 가지 희귀함이다. 아, 한낱 작은 여자가 이 세 가지 기특함과 네 가지 희귀함을 짊어졌으니 또한 일대의 기특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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