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한 시대가 호명한 남자, 한동훈의 미래 [이게 이슈]
[성지훈 기자]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 남소연 |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보수정당의 대표가 새해 벽두부터 광주를 찾고, 광주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헌법에 광주정신을 싣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한국 정치사를 십수 년 넘게 봐온 사람들에겐 다소 생경한 장면이다. 불과 십 년 전에도 1980년 5월의 광주엔 북한에서 침투시킨 간첩이 있었다고, 군인들은 그들을 잡기 위해 총을 쏜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치권 곳곳에, 고위 공직에 버젓이 있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법무부 장관이던 시절 인혁당 피해자에게 부과된 지연이자를 면제하라고 직권지시한 데 이어 제주 4.3 피해자 직권재심 청구 대상을 확대했다. 장준하 선생 유족들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항소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국가배상 소송에 대해서도 항소를 포기했다. 이 역시 생경한 일이었다. 1997년 이후 3차례의 (자칭) 민주진보정권도 하지 않은 일을 보수정당의 법무부장관에게 기대할 수 있진 않았으니까. 이 같은 행보는 보수집권여당의 법무부장관이자 보수진영의 '에이스'인 한동훈을 "진영주의에 휩싸이지 않은 합리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실제로 늘 합리적이고 치우치지 않은 율사(律士)의 지위를 포지셔닝했다.
그 세팅이 본인의 진짜 캐릭터인지, 혹은 고도로 계산된 (훗날의 그 무엇을 위해서든) 세팅인지는 사실 상관없다. 강남 출신의 1970년대생 검사를 대중들은 '그 무엇'이 되면 반드시 갚아야 할 정치적 은원이 없고, '우리는 이제 기억도 하지 못하는' 구시대적 진영주의에 빠지지도 않은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인식했다. 그즈음 그의 X세대 시절 발랄한 컬러 사진들이 인터넷을 떠돌기도 했다. 386의 비장한 대학시절 흑백사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를 지지하고 말고를 떠나 한동훈은 윤석열 정권이 만들어낸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그보다는 그 히트상품이 윤석열 정권을 지탱하는 데 공이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지만).
▲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법무부 종합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 남소연 |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역시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이다. '과정과 맥락', '가치와 지속가능'의 개념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곳곳에서 '누칼협'을 외치고 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욱 지속가능하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는 질문일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보다 모든 질문과 사유를 거세한 채 그저 단면에 집중하며 모든 상상과 사유와 개선과 반성을 거세하는 세태다. 그리고 이 누칼협의 시대를 근거하는 건 '법'을 이용한 책임회피다.
어떤 잘못을 말하면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답하고, 어떤 제도적 개선을 주장하면 '법적인 의무는 없다'고 말하는 납작한 사회다. 누칼협의 시대는 진영주의와 권위주의의 과거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보인다. 가치와 지향이라는 지지대 없이 합리와 이성의 외피가 덧씌워지며 만들어진 시대가 누칼협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치우치지 않은 율사 한동훈은 이 누칼협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남자다. '법꾸라지(법+미꾸라지)', 많은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법꾸라지란 조롱을 들었지만 한동훈만한 월척의 법꾸라지는 없었다. 그는 법무부장관 시절 많은 질문에 대해 '법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라며 질문을 봉쇄하거나, '그걸 대답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없다'는 식의 말로 대답을 피해 갔다.
그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약이 올랐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를 공박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 '리걸 마인드'에 젖어 자기의 정치생명을 영위해 왔다. 가치지향과 공공선의 추구 대신 '적'들을 공박하며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고 말해온 건 스스로 민주진보라 칭하는 이들이든, 스스로 애국보수라 칭하는 이들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영위한 납작한 정치가 오늘날 이 사회를 누칼협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래서 '법꾸라지' 한동훈을 지지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규모의) 많은 사람들은 한동훈을 '법꾸라지'가 아니라, (이 시대의 소명인) 법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정치 지형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작금의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을 '리걸 마인드'를 토대로 한 누칼협의 시대라고 한다면, 한동훈이야말로 시대정신에 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대거 나타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연, 천박한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는 건 천박할 수도 있는 법이다.
▲ 2022년 4월 13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2차 국무위원 후보 및 대통령 비서실장 인선 발표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법무부 장관에 내정된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 |
ⓒ 인수위사진기자단 |
누칼협을 시대의 소명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등장은 기성의 정치세력 모두에게 난해하다. 기성의 세력들은 그들의 가치를 기준으로 진영을 만들고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기반으로 정치를 영위해 왔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정치 주체에 대해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기성 정치권은 그동안 이들을 제 멋대로 '자기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칭) 민주진보진영은 그들을 세련되고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낀 세력이라고 생각해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진보진영의 편이라기보다는 그 상대가 속칭 '후졌기 때문에' 같은 편처럼 보였던 것에 가깝다. 권위주의 정권 이후 제대로 자유주의와 사회적 성숙을 이루기 전에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드러난 그 '후짐'에 대한 반대를 '우리 편'이라고 착각한 셈이다. 그들은 민주진보진영이 여전히 진영주의적이고,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서 '마찬가지로 후졌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여지없이 떠나버렸다.
(자칭) 애국보수세력은 그들을 합리와 자율, 성과와 효울에 익숙한 세대라고 생각해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주의에 입각한 능력과 성과주의가 새로운 세대의 세계관일 것이라고 무작정 믿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을 포섭하기엔 기성의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주의자도 아니었고 성과도 없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꼰대였다.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의 정책 어디에 성과와 효율과 능력이 있나. 그저 있는 것은 '인 마이 포켓'과 '최순실'과 '소맥'뿐인데. 그들은 그냥 어쩔 수 없이 후졌다.
이 와중에 나타난 한동훈은 앞서도 말했듯 이 새로운 세력 (혹은 세대)에 가장 적합한 정치인처럼 보였다. 그는 권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세련돼 보였다.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된 이후 그는 운동권 정치를 청산하겠다며 정적들을 청산대상으로'만' 규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노동조합과 서민들, 어쨌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세력들을 악마화하며 '카르텔'을 운운하는 정치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와 같다. 이 대결적 구도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등장한 이후 줄곧 고수해 오던 '탈진영', '합리성'의 이미지를 갉아먹는다. 결국 민주당, 또 한동훈 비대위원장이(어쩌면 윤석열 대통령이) 그토록 청산하고 싶어 하는 그의 정적들의 주장대로 '윤석열 아바타'라는 프레임만을 제공하면서.
그러는 동안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기성의 정치와는 다르게 합리적이고 맹목적이지 않은 율사라고 믿었던 그의 지지세력들은 떠나간다. '역시 저 집안은 후졌지'라고 판단하면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지금 보여주는 행보는 그를 새로운 정치지도자로 인식하며 지지를 보내주던 이들의 요구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는 오히려 그가 속한 '진영'의 정치 언어로 퇴행한 셈이다. 그 진영의 기성정치인들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그 지지율을 자기 진영의 지지율로 끌어오길 기대했겠지만, 그 지지 세력은 몇 번이나 그랬듯 '후지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떠나는' 세력이다(실제로 탄핵정국을 만들었고,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가, 윤석열과 한동훈을 지지하기도 했던 그들이다).
그렇다고 한동훈을 떠난 지지율이 민주당과 이재명의 지지율로 흡수될 까닭도 전혀 없다. 민주당은 유사이래 가장 높았던 지지를 파산시켜 사람들이 윤석열로, 한동훈으로, 아니면 정치혐오로 떠난 이유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낡은 진영주의에 파묻히거나, 음모론에 기반한 적대의 정치에 머무는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으로 느껴지는 세력에게 '합리와 이성으로 자신을 무장'했다고 믿는 이들은 지지를 주지 않는다.
새로운 전선, 천박하지 않은 시대정신에 대하여
▲ 여의도 국회의사당. |
ⓒ 권우성 |
다시 지금의 시대를 '누칼협의 시대'라고 규정한다면 현재의 존재하는 모든 정치세력들은, 그리고 새로운 줄 알았더니 곧장 후진 세력으로 다시 회귀해 버린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모두 명확하게 '승리'를 말할만큼 지지를 받기 어렵다. 이대로라면 서로를 갉아먹으려고 심력과 공적공간을 낭비하는 '정쟁'만 남게된다. 우리의 삶을 주조할 '정치'는 실종된 채.
그렇다고 이 천박하고 납작한 '누칼협 시대'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월척 법꾸라지가 다시 나타나야 하는 것 역시 아니다. 그 월척 법꾸라지란 결국 한동훈 비대위원장처럼 어느 쪽의 '후짐'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드러났다.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시대'를 넘어서는 어떤 정치적 지향, 그 지향을 명확히 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해왔어야 할 싸움이지만 아직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싸움, 천박함을 넘어서고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싸움. 기성의 정치세력 중 누가 그나마 나은지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력과 사람을 찾아내고 만드는 일. 하여 마침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더 이상 천박하지 않게 하는 일. 진영주의와 적대와 음모론과 편협한 리걸 마인드가 아니라, 사유와 상상력과 공공선과 지속가능성이 시대정신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만드는 일. X들과 헤어질 결심.
그리고 국민의힘에게도, 민주당에게도 이야기 해줘야지. "X들은 당신들을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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