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푸틴도 눈치 본다…세계 선거판 흔든 '맘 파워' 위력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 '엄마 파워'가 부상하고 있다. 진보·보수 성향의 엄마들 모임이 각각 회원 수십만명의 단체로 조직화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등 대선 경선 주자들이 잇달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교육·낙태 등 부모·여성에게 민감한 문제가 선거전의 주요 이슈로 대두하는 상황과 맞물렸다.
대선을 두 달 남긴 러시아에선 전장에 자녀·남편을 보낸 엄마·아내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일색인 정치 상황 속에 이들 단체가 사실상 '반기'를 들고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3년 만에 보수 맘 단체 13만명…트럼프 "엄마들 건들지 마"
이번 미 대선에서 가장 주목받는 보수 성향 어머니 단체는 '자유를 위한 엄마들(MFL·Moms For Liberty)'이다. 창립 3년 만에 미국 44개 주(州)에 걸쳐 총 13만명이 가입했다. 성소수자 인권 교육, 흑인 역사 교육 등이 백인과 이성애자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공교육 과정에서 제외하고, 관련 서적을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시키자는 운동을 벌여왔다.
MFL처럼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의 진보 성향 정책에 반기를 든 보수 성향 엄마들은 '엄마 곰(Mama bear)'으로 불린다. 엄마 곰이 새끼 곰에 대한 보호 본능이 강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주로 보수 성향 기독교인이 많고, 낙태에 반대하고 총기 보유를 옹호한다.
엄마 곰의 요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해온 공화당 경선 후보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플로리다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1~3학년 교실에서 성적 정체성 수업과 토론을 금지하는 '부모의 교육권리법'을 통과시켰다. 주 공립 고교의 심화 과정에서 배우던 ‘미국 흑인 역사’를 제외시켰고, 이민자 노동제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트럼프 전 대통령, 트럼프의 대항마로 급부상한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도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해 필라델피아의 유세 현장에서 "미국 엄마들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면서 MFL을 '풀뿌리 거물 세력'이라고 치켜세웠다.
헤일리 전 대사도 MFL이 반정부 극단주의 조직으로 분류되자 "이 단체가 테러단체로 몰린다면, 나도 회원으로 간주해달라"며 공개적으로 감쌌다. 로이터통신은 "이들 공화당 경선 후보들이 구애를 한 건 그만큼 (엄마들이) 주요 정치 세력이 됐다는 뜻"이라고 짚었다.
다만 최근엔 당초 예상보다 엄마 곰의 영향력이 제한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NYT)는 MFL이 공개 지지한 학교 이사회 후보 198명 중 60%가 당선되지 못했고, 공동창립자 브리짓 지글러의 남편이 성폭행 혐의로 수사받으면서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진보 엄마들, 성소수자·낙태권 이슈로 결집
미 진보 성향 엄마 단체 중엔 회원 30만명 규모인 '레드 와인 앤드 블루(RWB)'가 대표격이다. 2018년 여성의 풀뿌리 정치 참여를 목표로 시작된 이 단체는 교외에 거주하는 고학력 주부들이 주축이다.
회원 일부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엄마들이며, 보수 진영의 동성애 반대,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등에 반발해 결집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조 바이든 캠프는 진보 엄마들의 활동이 대선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특히 낙태권 이슈가 정치적 화두로 부각하면서 이들 진보 성향 엄마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앞서 트럼프 시절 보수 우위로 재편된 미국 연방대법원은 2022년 낙태권을 보장해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같은 해 중간선거에서 낙태 허용 쪽에 여성 표가 쏠렸다. 또 지난해 주(州)의회 선거에서도 낙태 허용에 찬성하는 진보 후보들이 유권자 선택을 받았다. 여기에 지난달 13일 미 연방대법원이 먹는 낙태약의 판매를 검토키로 하면서 "낙태 문제가 대선판의 핵심 이슈가 됐다"고 CNN은 전했다. 먹는 낙태약 판결은 대선 유세가 정점에 달할 오는 6월 말에 나온다.
'엄마 파워'의 역사…사커맘·안보맘·레이지맘
미국 정치권과 언론이 이들 단체에 주목하는 이유는 과거 대선에서 '엄마 파워'가 입증된 사례가 다수 있기 때문이다. NYT에 따르면 1990년대 교육에 열성인 '사커맘(Soccer mom)'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고, 9.11 테러 이후 안보를 중시하는 '시큐리티 맘(Security mom)'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재선에 기여했다.
또한 2020년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코로나19 부실 대처에 불만을 품은 ‘레이지맘(Rage mom)’의 지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푸틴 유일한 걸림돌은 군인 아내·어머니”
오는 3월 푸틴 대통령의 재선이 확실시되는 러시아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강제 징집된 장병의 어머니와 아내가 만든 단체들이 주목 받고 있다. '어차피 대통령은 푸틴'이란 지지 일색 분위기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보도했다.
이런 단체들 중 하나인 '집으로 가는 길'의 경우 아들과 남편의 귀환을 촉구하는 문구의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이고 푸틴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침묵하지 않으면 남편과 아들을 최전선 작전에 투입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단체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를 두고 "더는 잃을 게 없는 아내·어머니들을 막을 수 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韓 '정치하는 엄마들'…정치인 맘카페 러브콜
한국에서도 '엄마 표심'이 주목받고 있다. 2017년 발족한 '정치하는 엄마들'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단체는 지난해 소아 응급의료 시스템 붕괴의 책임을 물어달라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요청해 반향을 얻었고, 과거엔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하는 성과도 거뒀다.
일각에선 "육아와 지역 정보를 공유하는 맘카페도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다"는 분석이 나온다. 『맘카페라는 세계』를 쓴 정지섭 작가는 책에서 "맘카페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회원층인 30~50대 여성은 한창 사회활동이 왕성하고 삶의 최전선에 접해 있는 세대이기에 정치 관심이 많다"며 "때문에 일부 정치인들이 맘카페 등에 글을 올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지역 맘카페 운영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2019년 맘카페 회원과 미팅을 가졌다.
최근 여야 모두 4월 총선을 앞두고 20~40대 여성 표심을 모으기 위해 부심하는 상황도 이를 반영한다. 지난달 국민의힘은 총선을 이끌 비대위의 지명직 위원 8명 중 3명을 여성으로 배정했다. 기존 지도부에 비해 여성 수를 늘리고 연령도 낮춰 상대적으로 당 지지세가 약한 여성 유권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양상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총선'1호 영입 인재'로 40대 여성인 환경전문가 박지혜 변호사를 영입하는 등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앞으로 선거 이슈, 정치적 어젠다 설정에 따라 엄마들이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엔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여성이라도 처한 입장과 이해가 제각각이라 미국처럼 정치조직화하기 어려웠다”며 “하지만 엄마들이 향후 같은 지역기반이나 공동 관심사로 밀착하면서 어젠다 세팅을 하게 된다면 주류 정치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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