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승의 퍼스펙티브] 나토 최전선서 본 한반도…동맹 중요성 상기해야
중립의 시대가 저무는 세계
필자는 지난해 10월 노르딕·베네룩스센터장 자격으로 외교부와 주한 발트해 3국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북유럽과 발트해 3국을 방문했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발트해의 바람은 고풍스러운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구도심을 날려버릴 듯이 강했다. 핀란드만의 파도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몰아친다. 발트 3국의 안보 환경 역시 거칠다. 발트해에 인접한 세 나라는 동쪽으로 자연적 국경이 없고, 총인구가 700만도 채 되지 않는다. 영토도 전쟁 초기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보다도 작다. 옛 소련에 합병되며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던 쓰라린 역사도 공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이들 소국의 우려는 역사적 기시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군사적 강대국이자 핵 무장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이 지역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면 발트 3국은 자신의 역량만으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자유와 독립과 주권을 지켜야겠다는 의지는 단호하다. 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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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발트 3국, 중립 버리고 나토 가입한 건 생존 위한 선택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동맹이 주는 안보 확증 더욱 중요해져
각자도생 국제 질서에서는 약소국이 보다 큰 부담 지게 돼
한반도 넘어 글로벌 안보 행위자가 돼 외교 협상력 키워야
」
‘나토 호수’가 된 발트해
발트 3국의 공통적인 최우선 과제는 안보 확증이다. 과거 독일·스웨덴·러시아 등 강성한 주변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오랜 기간 독일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 쌓인 역사적인 반감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반감은 소련 시기 동안 오히려 ‘반감’되었다. 어느 쪽이 더 필요한 파트너인지에 대한 우선순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명확해졌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독일을 보다 가까운 파트너로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초반 발트 3국의 재무장관들은 일제히 독일로 향했다. 이미 그 시기에 유럽의 금융과 산업은 독일의 주도권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지정학적 최전선에서 발트 3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미국과의 동맹이다. 아직 실질적인 군사적 동원력이 경제력에 미치지 못하는 독일이나,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예측하기 어려운 프랑스에 의지하기보다는 미국과의 안보 동맹, 특히 미군의 주둔이 자신들의 안보와 경제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발트해 주위는 얼마 전까지 중립국과 NATO 회원국,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제 발트해는 핀란드와 스웨덴을 아우르는 NATO 국가들로 둘러싸인 ‘NATO 호수’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안에 러시아의 1945년 전리품이었던 칼리닌그라드가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작은 섬처럼 남아 냉전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약소국은 균형자 되기 어려워
“지금도 불안을 느낍니까?” 발트 3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을 방문하며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단호했다. “NATO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처럼 되지는 않아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되묻는다. “한국은 어떤가요? 미국의 확장억제는 믿을만한가요? 한·미·일 공조는 견고한가요?” 질문은 서로 반복되었다. 쪼개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오래된 문구가 여전히 맴돌고 있다.
유럽에서 중립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발트 3국은 1990년대 중반, 중립은 위험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핀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안보 정체성을 재정립하며 75년간의 중립을 접고 NATO 회원국이 되었고, 러시아와의 1340㎞에 달하는 국경으로 NATO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중립국이었던 스웨덴도 NATO 가입을 마무리하고 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가치의 측면에서 확연히 서방의 입장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
냉전 시기 공산과 서방 진영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는 것으로 보이던 핀란드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균형이요? 약소국은 균형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했던 것은 생존 외교입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냉정하다. 하지만 그 생존 외교는 결과적으로 역내 균형을 이루는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키겠다는 핀란드의 신념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쟁을 마다치 않을 만큼 견고했다. 550만 명 인구의 핀란드는 현재 북유럽·발트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군사 및 민간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다.
트럼프 등장 땐 국제질서 위기 올 수도
“규칙에 의한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서방이 약화되는 것은 큰 위기입니다.” 에길스 레비츠 전 라트비아 대통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첫마디를 꺼냈다. 그는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사법재판관을 역임했고, 작년 여름 대통령 퇴임 후에도 라트비아 국제법 특별대표를 맡고 있다. 원로 정치인이자 법조인인 그의 눈에는 힘의 정치로 귀환해 가는 글로벌 지정학이 더욱 위기로 다가온다. 국제 질서 규칙이 붕괴하면 가장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은 지정학적 단층대에 놓인 약소국들이다. 가치와 원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국가에 더욱 절실한 생존의 수단이 된다.
“만약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등장한다면 정말로 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2023년 NATO 정상회의를 주관했던 리투아니아에서 만난 여러 전문가는 강한 위기감을 표출했다. 미국이 고립주의로 나가고, 각자도생의 국제 질서가 펼쳐진다면 유럽과 NATO의 응집력은 약화할 것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서방의 분열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쉽게 달성하며 영향력을 키울지 모른다는 우려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대만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이후, 리투아니아는 집요한 중국의 보복에 당면하고 있다. 경제적 의존이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중국은 리투아니아가 관련된 거의 모든 글로벌 비즈니스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전에서 러시아 편에 섰던 중국을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그 위험을 감수하며 대결의 최전선에 서 있다. 미국과 서방이 흔들리게 되면 그만큼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 우려는 한국과 일본도 공유한다. 2024년 유라시아 지정학의 두 최전선에 던져진 최대 위협은 푸틴인가, 트럼프인가? 씁쓸한 질문이 던져진다.
글로벌 안보 담론 형성에 적극 나서야
발트 3국, 그리고 핀란드보다 한국은 훨씬 규모가 큰 나라다.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행위자다. 하지만 중국·러시아·북한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지정학적 구도와 무게는 유럽 지정학의 최전선에 놓인 이들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우리와 더 많은 대화를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의제들이 많습니다.” 출장 중 만난 발트 3국의 정책 결정자들과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의 방위산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발틱 안보회의’나 ‘리가 콘퍼런스’와 같은 이 지역의 안보 다자대화기구에도 한국이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이미 상당히 깊이 관여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이 그동안 눈여겨보지 못했던 새로운 군사, 경제안보의 장을 열어놓았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동북아에서의 동시다발적 갈등과 지정학과 지경학, 기술경쟁이 복합된 새로운 국제 질서는 하나의 위기가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불확실성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국제 질서에서 상대방의 선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낭만적 예측은 금물이다. 쓰라린 역사는 되풀이되기 쉽고, 희망 섞인 기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게 지정학의 숙명이다.
중립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동맹의 공고화를 외교의 중심축으로 놓으면서 주변국과 여러 겹의 양자, 다자관계를 더해가면서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글로벌 안보와 규칙 형성의 담론에도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문제의 해법에도 더 많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닮은꼴의 안보 지형에 놓인 NATO의 최전선에서 한국을 바라본다. 한국이 냉엄한 동북아 지정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벗어난 더 넓은 시각에서 글로벌 안보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그럴 역량과 시기가 되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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