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그것이, 인생

2024. 1. 9.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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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화가

뉴욕에서 살던 1990년대, 첼로를 전공한 이웃과 가깝게 지냈다. 그 시절 우리는 우연히 두어 번 길에서 마주쳤고, 세 번째 우연히 또 만나게 되면 밥이라도 같이 먹자 했다. 그때만 해도 그 동네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세 번째 우연히 만난 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의 집으로 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내 그림이 걸려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림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사서 벽에 걸어두었다가, 뉴욕으로 유학을 올 때 선물로 주셨다 했다. 그 뒤로 우리는 부쩍 친해졌다.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적지 않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왕비열전을 읽곤 했다. 전생에 왕비였나 보다 했더니, 진지한 얼굴로 명성황후였다 했다. 너는 전생에 누구였냐 물어서 안네 프랑크라 답하니,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해서 둘이 같이 한참 웃었다.

「 팬데믹 지나며 친구 개념 넓어져
서로 마음 터놓을 귀한 친구 소중
산다는 건 각자 자서전을 쓰는 일

그림=황주리

중학교 1학년 때 읽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내게 절망적인 삶 속에 희망의 불씨를 옮겨 심어준 감명 깊은 기록이다. 우리는 같은 과가 아니라서 더 친하게 지냈다. 하긴 황후의 삶인들 녹녹했으랴? 십 년 뒤 우리가 살던 곳 바로 앞의 세계 무역센터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즈음 그녀도 나도 아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뒤돌아보면 다 꿈이다.

지금은 자주 보진 못하지만, 첼로를 켜는 그때 그 시간의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친구의 개념이 넓어진 것도 같다. SNS 속의 친구들,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만난 배우들도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잠 안 오는 밤, 유튜브로 읽어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듣는다. 얕은 잠 속에 내용을 흘려보내다 문득 문장들이 가슴에 꽂힌다. 아쉬워서 자꾸 앞으로 돌리다가 잠은 달아나고 밤새 데미안은 끝없이 반복되고 윤회한다. 지금 다시 읽어도 더욱 절절히 와 닿는 따뜻한 사랑, 진정한 친구, 혼자됨의 두려움, 나이 든 지금도 극복하지 못한 성장통이 다시 고개를 든다.

소설가이면서 화가, 겸허한 마음의 인간 헤세는 평생 나의 롤모델이다. “친구와 포도주를 마시며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이 오묘한 삶에 관해 악의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다.” 헤세의 이 말은 늘 내 피로한 영혼을 위로한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귀한 친구와 정겹게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순간이야말로 죽어서도 그리울 것이다. 교만이란 조금도 묻어있지 않은 사람, 누군가로부터 얻으려는 게 없어서 늘 상큼한 풀씨처럼 자연스러운 사람, 그런 친구가 둘만 있어도 좋을 것이다. 친구가 하나씩 죽을 때마다 시합에 이긴 기분이 든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기억난다. 그만큼 나이 들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내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다 내 친구다. 하물며 내가 잘 안 되길 바라는 사람도 다 내 친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세상이라는 무대를 떠날 동 세대 친구들이다. 옛날 드라마만 해주는 채널을 좋아하는 어머니 곁에서 같이 드라마를 본다. 사람들은 머무르고 싶은 익숙한 시간대가 다 따로 있는가 보다. 참 순수한 사람들이 드라마 속에서 별 것 아닌 일로 슬퍼하고 기뻐한다. 잃어버린 우리의 옛 마음을 되돌려보는 기분이다.

옛날 드라마 속, 일찍 세상을 떠나 젊은 얼굴 그대로 기억에 남은 참 잘생긴 배우를 보시며, 어머니는 ‘참 아깝네.’ 하신다. 오십을 갓 넘겨 세상 떠난 동생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죽어간 그 수많은 젊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다들 오래 살았다. 꿈속에서인가 영화 속에서인가, 전쟁에서 심하게 다쳐 붕대를 칭칭 감고 죽어가는 열일곱 소년병이 간호사에게 묻는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은 예쁘겠죠? 남자친구 있어요?”

오래전 EBS 테마 기행의 진행자로 스리랑카에 갔을 때, 동행한 씩씩한 여성 프로듀서가 한 말이 생각난다. “선생님 말고 요즘 뜨는 이선균 배우랑 같이 올 걸 잘못했어요. 선생님은 곱게 자라 무거운 것도 못 들고 되게 불편해요.” 그때 이선균이 누군지 처음 알았다. 요즘 지인이 보내준 그의 흑백 사진이 나를 슬프게 한다. 모르겠다. 일찍 죽어 더 이상 늙지 않을 그대와 백 살까지 꿋꿋이 버틴 노익장 중 누가 더 힘이 셀지. 산다는 건 자서전을 쓰는 일이다. 어쩌면 두꺼운 책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암과 싸워 꿋꿋이 이겨낸 지인의 새해 메시지를 벽에다 붙여놓는다, “이 꼴, 저 꼴, 별꼴, 다 보며 오래오래 살아보자.”

전생에 명성황후였다는 친구의 첼로 연주를 듣고 싶은 새해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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