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삭막한 세상의 기적 같은 로맨스
마음에 드는 상대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여자가 연락처를 건넨다. 손글씨로 종이에 적은 전화번호다. 한데 남자는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를 무심결에 잃어버린다. 여자에게 연락하겠다고 했건만, 이름도 모르니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다. 우연히 마주칠까 싶어 함께 영화를 봤던 극장 주변을 여러 날 서성일 따름이다.
말만 들으면 어느 시대 연애담인가 싶겠지만, 요즘 얘기다.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희한한 로맨스 영화다. 21세기 영화인데도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하다. 영화의 배경은 21세기 중에도 최근이다. 여자가 집에서 라디오를 켤 때마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뉴스가 흘러나온다. 잠깐, 스마트폰 검색 아니라 라디오라고? 오해는 말길. 이들이 사는 곳은 외딴 시골이 아니라 수도 헬싱키다. 하지만 방금 만난 상대의 프로필을 소셜미디어에서 찾아보는 식의 장면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엇갈림을 거듭하다 다시 만나기까지는 우연과 우연이, 나아가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일까지 벌어진다. 81분의 길지 않은 상영 시간 동안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이 삭막한 세상에서 낯선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기적일 수 있겠다 싶어진다.
두 사람의 일상은 전쟁 뉴스 때문이 아니라도 팍팍하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던 여자는 유효기간 지난 식품을 가방에 넣어둔 것 때문에 해고당하고, 새로 구한 일자리에서도 뭔가 문제가 생긴다. 또다시 일자리를 구해 하루하루 출퇴근하는 여자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미건조하다. 남자 역시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것 없는 처지. 그 역시 동료와의 술자리에서조차 무미건조한 표정이다. 그런 표정들이 달라지는 건, 로맨스의 마법 같은 힘이다.
영어 제목도, 핀란드어 원제도 ‘낙엽’을 뜻하는데 우리말 제목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뮤지컬 영화의 고전 ‘사랑은 비를 타고’를 차용한 듯 보인다. 뮤지컬 영화는 아니지만, 꽤 많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극 중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표정조차 무미건조한 것이 묘미. 종종 뜻밖의 유머도 등장한다. ‘달콤쌉쌀’보다 ‘쌉쌀달콤’으로 분류할 로맨스다.
이런 영화가 있나 싶은 관객도 적지 않을 터. 이 영화는 지난 연말 개봉 직후부터도 상영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상영관마다 대개 하루 한 번 정도인 상영 회차는 전국 전체 상영 회차의 1%를 넘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2만 명 넘게 관람했다.
돌이켜보면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던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멀티플렉스 상영관마다 다른 영화를, 영화마다 적어도 상영관 한 곳에서는 온종일 상영하던 시절도 있었다. 달라진 풍토를 탓하기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걸 고마워하는 편이 낫겠다.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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