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기업 양성평등, 1위 네이버·꼴찌 HDC현산[K인구전략]
여성 정규직 수 많고 근속연수·연봉 높을수록 상위권
하위기업,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 제도 시행 미흡
편집자주 - 대한민국 인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기업에 있다. 남녀 구분 없이 일로 평가하는 기업 내 분위기와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곧 K 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일터에서의 부담감이 걸림돌이 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경제는 가족친화 정책을 선도하는 기업을 찾아가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지점을 짚고,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기업과는 다각도에서 함께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기업부터 변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분석한다. 금전적 지원보다 심리적 부채감을 줄여주는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가 핵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한다.
"결혼과 출산의 기회비용을 어떻게 낮춰주고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게 하느냐가 저출산 문제의 핵심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상임위원인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의 말이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도 "일·가정 양립이 가장 근본적인 저출산 대책"이라고 강조한다. 일·가정 양립은 양성평등과 맥이 닿는다. 기업에서의 양성평등은 곧 출산 여건(출산휴가· 출산 지원 등), 육아 여건(육아휴직· 유연근무· 어린이집 개설 등), 커리어 여건(승진· 보직· 임원 진출 등)을 개선해 일·가정 양립을 실현함으로써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에 아시아경제는 국내 대표 기업들의 성별 고용 상황을 조사해 객관적 점수로 지표화했다. 상장사 기준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 중 분석 가능한 96개 기업을 대상으로 정규직수, 근속연수, 평균 연봉, 사내·외 이사 등의 5년간(2018~2022년) 현황과 추이를 분석했다. 조사 결과 1위는 네이버, 최하위는 HDC현대산업개발로 나타났다. 하위 그룹에 있는 기업들을 단순히 ‘양성평등 문화가 나쁜 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낮은 점수를 기록한 기업을 중심으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ESG 보고서)를 추가 분석한 결과, 대체로 가정 친화적인 정책 시행이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건설·중공업 최하위권… 꼴찌는 HDC현대산업개발
최하위는 HDC현대산업개발로 9.8점을 받았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정규직수(1.25점), 근속연수(3.50점), 연봉(5.00점) 등에서도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특히 근속연수 부문에서 하위 5번째에 그쳤다. 사내이사는 물론 사외이사도 여성이 1명도 없어 두 개 항목에서는 0점을 받았다. 한솔제지(12.3점), 두산에너빌리티(12.8점), 고려아연(13.5점) 등 전통적인 제조 기반의 기업들도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하위 기업들은 남성 육아휴직 등 대표적인 일·가정 양립 제도 사용이 매우 미흡했다. HDC현대산업개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보고서에 따르면 육아휴직 대상자 남성의 경우 2020년 307명, 2021년 251명, 2022년 285명이었는데 정작 사용한 남성 직원의 수는 각각 1명, 3명, 7명에 불과했다. 여성 육아휴직도 마찬가지였다. 대상자 수도 적고 사용자 수도 적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같은 기간 여성의 육아휴직 대상자 수는 19명, 15명, 5명이었고 실제 사용자는 5명, 4명, 2명이었다. 두산에너빌리티도 육아휴직 대상자는 2022년 기준 남성이 1618명이었으나 실제 사용자는 53명에 불과했다. 여성 대상자는 같은 해 89명이었고 실제 사용자는 19명이었다.
하위권 그룹에는 전통 제조기업 외에도 건설기업들이 자리했다. 태영건설(13.8점), 코오롱글로벌(14.0점), GS건설(14.8점) 등이 하위권을 차지했다. 방산업체인 한국항공우주(14.5점), 자동차 부품업체 HL만도(14.8점), KG모빌리티(옛 쌍용자동차·14.8점) 등도 하위권으로 이름을 올렸다. 건설·중공업의 부진은 여성 비율이 낮은 업종 특성도 일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여성 사내이사 100% 앞세운 네이버, 1위 기록
네이버(NAVER)는 총점 100점 중 35.5점으로 종합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정규직수(4.25점), 근속연수(8.50점), 연봉(7.75점) 부문에서 평균치를 웃도는 점수를 받았고, 사내이사 부문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15.00점을 획득했다. 사내이사 중 여성이 사실상 전무한 국내 상황에서 네이버는 100대 기업 중 유일하게 사내이사 2명(최수연 대표이사, 채선주 대외·ESG정책 대표이사)이 모두 여성인 기업이다.
네이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가족친화 제도는 유연근무 제도다. 업계 최초 주 5일제 근무 도입과 오전 10시 출근 등이 대표적이다. 네이버는 2022년 기준 여성 직원 비율 39%, 여성 관리자 비율 30%, 사업대표 및 총괄 비율도 21%에 달했다.
코웨이(32.3점)는 근속연수(16.25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종합 2위를 기록했다. 근속연수는 근로자가 동일 기업에서 계속해 근무한 연수를 뜻한다. 남성 대비 여성 근속연수 비율은 5년 새 61.7%포인트 올랐다.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여성의 근무 기간 등이 반영된 결과다. 다만 여성 정규직수는 5년 사이 18.9%포인트 줄어 낮은 점수(2.75점)를 받았는데, 2020년 남성 위주인 수리·서비스(AS) 직군 인력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여성 정규직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수치가 반영됐다. 코웨이는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가족친화우수기업을 5회 연속으로 재인증받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인 여성 관리자 비율 끌어올리기에 나섰다. 2022년 여성 관리자 비율을 29.2%에서 2030년 35.0%로 상향시키는 목표를 세웠다.
3위는 카카오(31.5점)였다. 같은 업종인 네이버에 비해 정규직수(4.75점), 근속연수(10.00점), 연봉(9.25점), 사외이사(7.50점) 부문에서 모두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사내이사에서 0점을 받아 순위에서 밀렸다. 지난해 말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가 카카오 새 대표이사로 선임된 만큼 올해 지표는 한 단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카카오의 ESG보고서를 살펴보면 매출 발생 부서의 여성 비율은 2022년 기준 70.1%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카카오 임직원은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경우 2년(법정 기준 1년 포함)의 육아휴직을 쓸 수 있고 질병 및 노령, 사고 돌봄 등 다양한 사유로 발생한 가족 돌봄의 유급휴가도 제공 받는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 계열사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인 6위(29.5점)를 차지했다. 여성 임금은 남성의 91.58%에 달한다. 여성 임직원 수는 전체의 40%에 달하는데 국내 제조업 평균 30%에 비해 1.5배 높은 수준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입사 지원 서류에서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라고 봤다. 관리자급 여성 직원 역시 상대적으로 많았다. 여성 임원 비율은 2021년 21.9%를 기록했고, 여성 관리직 비율은 2022년 기준 26.8%, 여성 중간관리직 비율은 33.2%에 달했다. 여성 근로자와 신규 입사자 등의 사회적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기숙사를 무상지원한다. 여성 리더십 강화 교육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하지만 이들 우수기업마저 한결같이 출산율 공개에 소극적이어서 양성평등 정책과 출산율 간 상관관계 추적이 어려운 건 아쉬운 대목이다.
반도체 자존심 대결, SK하이닉스 승리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는 12위(26.8점)로 삼성전자 공동 21위(25.5점)보다 9단계나 순위가 높았다. SK하이닉스는 근속연수에서 11.50점, 연봉에서 8.75점을 기록했다. 제조업 기반의 업종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여가부가 선정한 가족친화 최고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족친화 최고기업은 15년간 가족친화 인증을 유지한 기업에 수여된다. SK하이닉스는 꾸준히 저출산 문제와 여성인재 경력단절 등에 신경을 써왔다고 자평한다.
삼성전자는 대내외적인 기업 명성에 비해 매우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여성 사내이사가 단 1명도 없고, 정규직 부문에서 성별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 남성 대비 여성 정규직원의 비율은 2022년 기준 26%에 불과했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부문에서 하위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정규직수 부문에서 2.50점을 기록했다.
이차전지 양극재 제조기업 엘앤에프는 삼성에스디에스, LG유플러스 등과 함께 공동 24위(25.3점)를 기록했다. 여성 임원이 1명도 없고, 정규직 수도 10배 차이가 났지만, 근속연수와 연봉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연봉 부문에서 12.50점으로 1위를 기록했는데 2022년 1인당 평균 급여액이 남성 7682만원, 여성 8675만원으로 여성이 더 높았다. 근속연수도 남성 3년1개월, 여성 4년2개월로 여성이 더 길었다. 엘앤에프는 여가부로부터 올해 첫 가족친화인증을 받기도 했다. 엘앤에프 관계자는 "경력직보다는 신규 입사한 후 오랜 기간 근무하는 여성 수가 많은 편"이라면서 "유연근무, 육아휴직 등 관련 제도 활용도 높다"고 설명했다. 방산업체인 풍산도 종합점수 29.0점으로 7위를 기록했는데, 근속연수(12.75점)와 연봉(10.26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함연지 vs 임세령" 공동 4위
식품업계 경쟁사인 오뚜기와 대상은 나란히 공동 4위(30.3점)를 차지했다. 오뚜기는 정규직수(6.25점)와 연봉(8.00점), 사외이사(5.0점) 부문에서, 대상은 근속연수(12.75점)와 사내이사(7.00점)에서 상대적으로 점수가 높았다.
대상의 ESG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관리직 중 여성 비율은 2020년 16.2%에서 2022년 18.4%로 소폭 증가했다. 다만 창업주 임창욱 명예회장의 차녀 임상민 부사장이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려 여성 고용 등 관련 취지와는 다소 결을 달리한다. 장녀 임세령 부회장의 경우 미등기 이사로 마케팅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오너가 3세이자 뮤지컬 배우 함연지씨를 내세워 적극 마케팅을 펼쳐온 오뚜기는 여성 사외이사만 선임했다.
CJ 계열사는 전반적으로 우수한 수준을 보였다. CJ제일제당은 공동 14위(26.3점), CJ프레시웨이는 공동 16위(26.0점), CJ대한통운은 공동 21위(25.5점)에 이름을 올렸다. CJ제일제당은 남녀 간 연봉 격차가 크지 않고, 사내이사 중 여성이 1명 포함돼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올해 3월 임기가 만료되는 김소영 AN사업본부장(부사장 대우)은 CJ제일제당의 첫 여성 사내이사다. 다만 일·가정 양립 제도가 잘 갖춰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정규직(3.75점)과 근속연수(6.25점)의 성별 격차가 컸다.
아모레퍼시픽(9위·28.0점)과 삼성전기·이마트(공동 10위·27.0점)는 정규직수와 근속연수, 연봉 등에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사내이사 부문에서 0점을 받으면서 순위에서 밀렸다.
여성 고용 확대는 인구 문제 해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최근 북유럽 국가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률이 높아졌음에도 오히려 출산율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하는 여성이 많을수록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고정관념을 깬 결과다. 여성 고용 확대는 국가경쟁력으로도 이어진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해 방한 당시 "한국이 성별 격차를 주요국 수준으로 낮출 경우 1인당 소득이 18% 증가할 수 있다는 최근 연구 결과가 있다"며 "국가와 기업의 (격차 해소) 노력이 엄청난 혜택을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라우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특히 기업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 발표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해 ‘남녀 간 공평한 역할과 관련한 기성세대 교육과 기업문화의 변화’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또 일본을 예로 들며 일본은 국가적으로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과 관련해 가장 포용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직장 내 문화는 여전히 정책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김유리·이현주·정현진·부애리·공병선·박준이·송승섭 기자, 김필수 경제금융에디터
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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