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적벽대전 | “더 끓이면 물이 늙어 마실 수 없어요”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4. 1. 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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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으로 인해 질 줄은 몰랐다.” (조조)“당신에게는 전쟁이 차 한 잔이 아니던가?” (주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책 한 권을 꼽으라면? 여러 훌륭한 저작이 있겠지만, 단연 <삼국지>가 아닐까. 보통 <삼국지연의>라 불리는 그 책이다.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를 바탕으로 원과 명 교체기 인물인 나관중이 재구성한, 일종의 장편 역사소설이다.

<삼국지>에는 관도대전, 이릉대전, 적벽대전의 3대 대전이 나온다. 삼국지 3대 대전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는 전쟁은 단연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정사 <삼국지>의 위서 무제기 편에 나오는 적벽대전에 대한 서술은 이렇게 단 세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 세 문장에 다양한 스토리가 덧붙여져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 편이 탄생했고, 2008년 오우삼 감독은 그 스토리에 또 다양한 상상력을 덧붙여 영화 <적벽대전>을 만들어냈다.

왜 단연 적벽대전일까.

영화 속에서 제갈량(오른쪽, 금성무 역)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을 예측해 냄으로써 조조의 30만 대군을 화공으로 물리치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무엇보다 많은 이가 열광하는 전형적인 ‘다윗과 골리앗’ 스토리라는 점부터 심금을 건드린다.

당시 승승장구하던 조조가 천하통일을 하겠다며 남하하고 있던 상황.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역시 적이었던 촉의 유비와 오의 손권이 손을 잡는다. 손은 잡았지만 여전히 연합군 5만 군사는 조조의 30만 대군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세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연합군 5만 군사는 조조의 30만 대군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다. 게다가 승리의 주역이 <삼국지> 스토리의 가장 사랑받는 두 주인공 유비와 제갈량 아닌가. 내내 마음 졸이다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뛸 수밖에 없는 플롯인 셈이다.

물고기 눈같은 거품이 일도록 끓임이 첫번째요
가장자리가 용솟음치도록 끓이는게 두번째 끓음인데…
그뿐인가. 적벽대전에서는 제갈량의 지략과 매력이 최고조로 극화되어 나타난다. 실제로야 그랬겠냐만, 책과 영화에서는 제갈량의 책략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열쇠였다고 얘기한다.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을 예측했고 그 예측에 기반해 짜낸 전략대로 조조의 30만 대군이 화공에 당해 몰살되었다는, 뭐 그런 스토리다.

이 단순한 스토리를 오우삼 감독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박진감 가득한 영상으로 재현해냈다.

그중 백미는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까지 조조가 출병하지 못하도록 잠시 조조를 묶어두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끈 인물은 소교(린즈링 분).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주유(양조위 역)가 매우 비중 있게 등장한다. 손권의 책사 주유는 유비에게 있어 제갈량 같은 인물이다. 소교는 그 주유의 부인. 어린 시절 조조가 짝사랑했던 여인으로 그려진다.

제갈량(금성무 분. 원래 양조위가 맡을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금성무로 바뀌고 양조위는 주유 역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이 모든 책략을 완성했지만, 문제는 조조의 출병 시간. 연합군이 알아낸 출병 시간에 맞춰 출병이 이뤄지면 계산이 어긋난다. 워낙 군사력이 열세한 탓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기회를 잡아내기 전 연합군이 조조군에 몰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고민하던 연합군 앞에 “내가 조조를 잡아 시간을 끌어보겠노라”며 나선 이가 소교다. 위험하다며 다들 말렸지만, 소교는 거침없이 자신만의 출병을 단행한다.

그렇게 홀로 조조를 찾아간 소교는 “이 싸움이 끝나고 네가 끓인 차를 음미하겠다”며 내치려는 조조에게 “먼저 한 잔 드시지요, 긴장도 푸실 겸”이라면서 막아선다.

정갈한 동작으로 차를 우려내는 소교. 우선 다건(찻자리에 쓰는 작은 수건)으로 손등과 손바닥을 정갈하게 닦고 다하(찻잎을 담아두는 작고 넓적한 그릇)에 담긴 찻잎을 차시로 긁어 다구에 넣고 동주전자 안에서 끓는 물을 나무국자로 덜어내어 차를 우린다.

“서둘지 마십시오. 우선 차 색을 보시고 차 향을 맡으세요.”

“차를 끓임에 있어 무엇이 가장 어렵지?”

“찻잎, 가열시간, 물의 질, 찻잔 모두 중요하지요.”

(촛불을 통해 바람의 방향이 막 바뀌려는 찰나, 조조가 이를 알아챌까 초초해하며 조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소교는 조조의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 돌리려)

“끓이는 방법이 가장 어렵습니다. 물고기 눈 같은 거품이 일도록 끓임이 첫 번째요.

가장자리가 용솟음치도록(구슬 같은 거품이 일도록) 끓이는 게 두 번째 끓음인데 이때 가장 향기로워요.

파도처럼 힘찬 물결이 이는 것이 세 번째 끓음인데 더 끓이면 물이 늙어(쇠해져) 마실 수 없게 되지요.”

이쯤 되면 눈치채셨을까.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물’에 대한 이야기다.

예로부터 물맛이 차 맛을 결정짓는다 할 만큼 다인들은 찻물에 민감했다. 차 맛을 가장 좋게 하는 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약수터를 전전했다. 지금도 통도사 인근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와 꼭 그 물로 차를 우려 마신다는 이도 상당수다. 그렇게까지 해서 차를 마셔야 하냐고? 꼭 그렇게까지 해서 차를 마셔야 할 일은 아니지만, 물 맛이 차 맛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팩트’다.

물의 종류 뿐 아니라 물을 끓이고 담는 다구의 소재도 차 맛에 영향을 끼친다. 무쇠솥과 주전자에 물을 끓이면 차를 우렸을 때 더 맛이 좋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 윤관식 기자>
약수터 물까지는 아니어도, 차를 우릴 때 어떤 생수를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보통은 ‘삼다수’나 ‘백산수’로 우리는 게 차 맛을 가장 잘 뽑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생수 맛이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냐고?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TDS라는 수치가 있다. 커피에 관심이 많다면 들어봤을 용어로, 커피의 총체적인 풍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그 TDS가 커피뿐만 아니라 차의 풍미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TDS는 총 용존 고형량(Total Dissolved Solid)의 약자다. 물속에는 다양한 미네랄 등이 녹아 있는데, 미네랄 등이 많이 녹아 있어 총 용존 고형량이 많아지면 TDS 수치는 높아진다. 거꾸로면 당연히 TDS 수치가 낮아진다. 물속에 미네랄이 많은 용암수나 미네랄워터 등이 TDS가 높다.

보통 TDS가 높으면 차 맛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고 알려져있다. 왜 TDS가 낮은 물이 차를 우리기에 좋을까. 물속에 다양한 미네랄이 녹아 있으면 아무래도 좀 더 두텁고 다양한 맛이 난다. TDS가 낮은 물은 흔히 말하는 ‘맹 맛’에 가깝다. 생수만 마실 때는 두텁고 다양한 맛이 나는 물이 괜찮을 수도 있지만, 그런 물에 차를 우리면 차의 원래 맛을 느끼기 어려울뿐더러, 차 맛에 독특한 물 맛이 가미되면서 오히려 안 좋은 풍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차 우리기 좋은 물로 꼽힌다는 백산수와 삼다수의 TDS는 어느 정도일까? 백산수와 삼다수는 생수 중에서도 가장 TDS가 낮은 생수다. 증류슈의 TDS가 0이라고 하면 삼다수는 33, 백산수는 48정도 나온다. 볼빅이 92, 미네랄이 유독 많은 것으로 유명한 에비앙은 무려 267이 나온다. 비싼 차를 비싼 물에 우려 마시겠다고 에비앙을 사용했다간 오히려 차 맛을 해칠 수 있다는 의미다.

커피와 차 풍미에 큰 영향 미치는 TDS(총 용존 고형량)
TDS수치 낮은 물일수록 차 우렸을 때 정확한 맛 보여줘
지금이야 과학적으로 TDS가 차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예전에는 그런 내용을 몰랐을 터. 그저 수많은 경험에 의해 “어디 물을 쓰면 차 맛이 좋다더라” 정도로 알음알음 전해졌을 것이다. 결국 그 ‘어디 물’이 알고 보면 TDS 낮은 물이었을 공산이 크다.
차를 우리기 가장 좋은 생수로 보통 ‘삼다수’와 ‘백산수’가 꼽힌다
물의 종류뿐 아니라 물을 끓이고 담는 다구의 소재도 차 맛에 영향을 끼친다. 일본은 예부터 무쇠솥에 끓인 물을 최고로 쳤고, 그래서 일본에서는 무쇠솥과 무쇠주전자가 발달했다. 은탕관이나 동탕관에 끓인 물을 쓰는 이유도 비슷하다.

영화에서는 ‘물을 얼마나 끓일 것인가’에 대한 대사가 꽤 정교하게 나온다. ‘물고기 눈 같은 거품이 일도록 끓은 후 가장자리가 용솟음치게(구슬 같은 거품이 일도록) 끓는 상태로 들어갈 때 그 물로 차를 우리면 된다’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거기서 더 끓인 물로 차를 우리면 차 맛이 없다는데, 실험해보지 않아 확인 불가다.)

여기서 ‘물고기 눈처럼 끓인다’는 표현은 물이 끓는 모양을 묘사한 직유법(직접적으로 비유)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일종의 관용어다. 게 눈은 물이 끓기 시작할 때에 일어나는 자잘한 기포를 말한다. 소식(소동파)의 <시원전다(試院煎茶·과거시험장에서 차를 끊이다)>라는 시에 “게의 눈을 이미 지나서 물고기 눈이 나오니, 쐐애쐐애 솔바람 소리와 흡사하구나(蟹眼己過魚眼生 颼颼欲 作松風鳴)”라는 구절이 있다. 이후 중국인은 물론 우리 조상들도 찻물을 묘사할 때 ‘게의 눈’과 ‘물고기 눈’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했다.

다시 영화 <적벽대전>으로 돌아가서.

두근두근한 마음을 누르며 차를 우리던 소교가 잠시 실수해 찻물이 넘칠락 말락 한다.

“넘친다, 넘쳐.”

“승상께서는 이 찻잔과 같습니다. 항상 모든 게 넘쳐 계시기에 다른 이의 말을 더 담지 못하시지요. 가슴에 넘치는 야심을 품고 적벽에 오셨으니 누군가 그 가슴을 비워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너무 넘쳐 더 담지 못하는’ 그런 상태는 아닌가. 30만 대군을 데리고 5만 군사에 속절없이 패하고 만 조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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