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오현정 2024. 1. 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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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건강 ON] 책 <일하다 아픈 여자들>

[오현정]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시작하면, 일을 시작한 순간부터 그 일로 인해 아플 가능성이 생긴다. 이 명제를 틀렸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니더라도 모든 남성,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청소년, 노인 등 누구나 될 수 있다. 어떤 일은 건설업, 제조업부터 시작해서 서비스업, 더 나아가 예술 활동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산업재해'(이하 '산재')라는 단어를 주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하라고 하면 대다수가 건설업 또는 제조업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그릴 것이다. 산재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이자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며, 여전히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에서 산재 건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외에 산재는 아주 드문 걸까?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우리가 이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건설업, 제조업이 아닌 업종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의 산재도 상대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여성 노동자의 산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여성이 일을 하면 당연히 그 여성은 산재를 겪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을 인지해서 보거나, 듣거나,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일터에서 아프거나 다치는 여성 노동자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 산재'는 여러 여성 노동자와 산재 제도를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산재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더 확장한다.

지금까지 노동자의 건강이 누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일터에 있는 수많은 몸들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는 책이 나왔다. 바로 <일하다 아픈 여자들>이다.
 
 『일하다 아픈 여자들』, 이나래·조건희·류한소·송윤정·이영희·정지윤 지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2023, 빨간소금.
ⓒ 빨간소금
 
언젠가 어디선가 만난 그 여성 

1부는 산재를 겪은 다양한 업종의 여러 여성 노동자를 보여준다. 1장에서는 남성 노동자가 많이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3장에서는 마치 위험 요인이 없어 보이는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4장에서는 가사 노동, 보건 및 사회복지 노동 등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일하는 여성과 프리랜서의 위치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1, 3, 4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성 노동자는 우리 주변에 많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내가 앞서 나온 노동자와 같은 업종이나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 수 있으며, 또는 비슷한 질병으로 노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분명 유사한 업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나 비슷한 질병으로 아픈 사례는 분명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1부가 단순히 여성 산재 사례의 노동 환경이나 특정 업종의 조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2장에서는 개인이 가진 특성 때문에 모든 일터에서 낯선 사람으로 부유하는 장애인 노동자와 성 소수자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5장에서는 산재가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가족공동체의 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자신이 가진 소수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2장 또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며, 5장은 산재가 아니더라도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있어 돌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6장은 그렇다면 왜 1~5장에서 우리가 보았던, 분명히 존재하는 여성 노동자의 산재 사례가 산업재해와 관련된 통계와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지 이야기한다.

'산재'라는 제도에서 여성의 몸은, 건강은
 
 병원. (자료사진)
ⓒ pixabay
 

2부에서는 산재의 처음, 중간, 끝이라 할 수 있는 신청, 요양, 복귀 과정에 대해 담았다. 요즘 몸이 피곤하거나 힘들 때 주변 사람들이 "그거 다 일 때문이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플 때 내 질병이 일 때문이라 생각하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일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해도 산재 신청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7장은 여전히 산재 신청이 어려운 이유를 보여준다. 산재 제도에 대한 오해, 고용 불안정으로 인한 산재 은폐, 특수고용노동자의 산재 보험 어려움, 일과 질병을 연관 짓지 못하는 의료인, 정신질환과 유산 등 산재라 인식하지 못하는 질환들에 짚어준다. 8장은 산재가 승인되어 요양하는 과정을 다룬다. 왜 산재가 승인되어 요양 과정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지, 왜 요양 후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많은지, 왜 어떤 사람은 산재 신청이 아닌 공상 처리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9장은 왜 어떤 여성 노동자는 산재 후에 일터를 떠나지만, 어떤 여성 노동자는 산재 후 일터로 다시 돌아오는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며, 아팠던 사람이 다시 일할 수 있으려면 사업장의 변화뿐 아니라 동료들의 지지 또한 중요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10장에서는 노동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아프지 않게 노동하기 위해 또는 아파도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 위해서 어떤 제도가 있을지 모색하며, 이를 위해 일본과 독일의 사례와 비교적 최근에 시행된 국내 상병수당 제도의 설명과 의의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책에 펼쳐진 여러 이야기 중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1부의 5장과 2부의 9장이다. 산재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에 영향을 주며, 산재에서 회복하고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가는 데 동료들의 지지 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가장 선행해야 하는 단계는 문제 인식이다.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로로든 그 문제를 자주 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성 산재'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어디선가 '여성'이 일을 하고 있고, 일을 해서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자주,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시선으로 본다면 여성 노동자가 있는 다양한 노동 환경과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산재 신청, 요양, 복귀 과정에 대해서 들려주는 이 책은 분명히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다. 여성 노동자들의 여러 목소리를 통해 내가 다양한 노동 환경과 산재에 대해 조금 더 진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의 세계도 조금 더 선명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나아가 책을 통해 "모든 몸이 더이상 위험하지 않은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2부 10장) 계기를 함께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오현정 님은 한노보연 회원으로 여성노동건강권팀에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1월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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