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대통령 직접 사과하면 변화 있을 것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었던 현대 측의 협력을 받았습니다. 현대는 대북 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전력·통신·관광·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습니다.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이 공개적으로 문제가 된 이상 정부는 진상을 밝혀야 하고,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퇴임을 열흘 앞둔 2003년 2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불법송금 의혹이 논란이 되자 이런 내용이 담긴 담화문을 발표했다. 물론 전년도 국정감사에서 이 의혹이 불거진 뒤 5개월이 지났고 한나라당 등 야당이 대북 불법송금 의혹에 대한 특검법을 발의해 국회 통과 가능성이 유력한 시점에 떠밀리듯 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담화문을 보면 ‘실정법상 문제가 있지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수용했다’(정책 판단의 근거)거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져야 한다’ 등 근래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눈에 띈다.
1900자 분량의 김 전 대통령 담화문에는 ‘책임지겠다’는 표현이 세 차례 등장한다. 물론 실제 사법적 책임은 김 전 대통령이 아닌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등 측근들이 졌지만, 담화문만 놓고 보면 지도자의 언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 담화문을 보면서 윤석열 대통령 생각을 했다.
총선을 석 달가량 앞두고 여권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문제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일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특검법(김건희 특검법)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특검법은 내용뿐 아니라 추진 절차까지 총체적으로 문제가 많은 법이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하등 관련 없다. 이미 10여년 전 벌어진 일을 전 정부에서 2년 가까이 수사했는데, 그걸 다시 규명한다고 또다시 100명 넘는 인력을 들여 수사한다는 건 누가 봐도 상식적이지 않다. 야당이 재의결을 서두르지 않는 것만 봐도 총선에 써먹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데 정작 여론조사들을 보면 이런 법에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부정 여론이 60% 이상이다. 중도층은 말할 것도 없고 60대나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 등 여권에 비교적 우호적인 집단에서도 부정적 반응이 더 많다.
여권은 연일 이 법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법인지 조목조목 부각한다. 그러나 거부권에 대한 부정 여론이 높은 건 사람들이 특검법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김 여사 행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윤 대통령이 김 여사 문제에 시종일관 함구해 온 영향도 크다고 본다. 지난해 11월 말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영상이 공개된 후 한 달 넘도록 대통령실은 아무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배우자 문제는 참모가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이슈다. 윤 대통령 최측근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마찬가지일 거다. 윤 대통령 본인이 아니면 상황의 반전을 꾀하긴 어렵다. 물론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의 무게감을 고려하면 대통령의 언급 자체가 이슈를 키우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야당과 언론이 사과한다고 그냥 넘어갈 리도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제 가족의 일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모습만으로도 변화를 보여줄 수 있다. ‘사과하면 진짜 문제 있는 줄 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김 여사 문제는 ‘문제없다’고 버티기만은 어려운 단계다.
윤 대통령의 침묵은 ‘제왕적 대통령’을 탈피하겠다며 청와대를 나오고 ‘도어스테핑’도 감행했던 초심과도 배치된다. 대선 때부터 이어진 김 여사에 대한 온갖 추측성 루머와 공격이 야속하겠지만 그런 감정 또한 윤 대통령이 국민 앞에 솔직하게 밝히면 오히려 김 여사 문제를 보는 대중의 시각도 달라질 수 있다. 특별감찰관이나 제2부속실 설치 같은 후속책은 그 뒤에 마련하면 된다.
이종선 정치부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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