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AI 김대중 “서로 협력해야”… 말로만 통합 외치던 여야 숙연
“과거에 매여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지난 6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열린 행사에서 AI 기술로 구현한 김 전 대통령(DJ)이 무대에 깜짝 등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제 생애를 돌아보면, 민주주의·인권·평화 실현을 위해 많은 고난에 찬 일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불행한 일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면서 안정과 평화와 번영의 나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생전 DJ는 과거에 매여 싸우는 대신 국민 분열을 치유하는 데 주력했다.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사지(死地)로 내몬 이들에 손을 내미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내란 음모 조작 사건’으로 고문까지 받았던 DJ는 1997년 대선 공약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내걸었고, 당선 직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사면을 합의·발표했다.
유신 시절인 1973년엔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역시 DJ의 공약이었다. 200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자격으로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아버지 시절 고생한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한다”며 화답한 모습은 여야를 넘어 국민 통합 정신을 계승한 장면이었다.
6일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도 모두 ‘DJ 정신’을 강조했지만, 은근히 상대를 탓하거나 말뿐인 통합을 외쳐 아쉬움을 남겼다. 피습을 당해 입원 중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고민정 최고위원이 대독한 축사에서 “지난 1년 7개월간 언론 탄압, 노동 탄압이 되살아났다”고 지적했다. 정부·여당에선 “호남에서도 영남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열심히 하겠다”(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갈등을 넘어 통합, 신뢰를 여는 데 힘쓰겠다”(한덕수 국무총리)는 말이 나왔으나, 누구도 야당과의 협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은 많은 핍박을 받았음에도 집권 후 일체 정치 보복을 하지 않는 통합의 정치를 펼쳤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오늘 김 전 대통령님이 염원한 세상이 다시 멀어지고 있고,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며 현 정부를 향해 뼈 있는 말을 남겼다.
DJ의 육성을 재현한 ‘AI 김대중’은 정치권의 축사가 모두 끝난 뒤에 등장했다. 거야(巨野)의 입법독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는 정치권을 향한 고언(苦言)에 행사장은 순간 숙연해졌다. 이날 DJ의 육성은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민정수석을 지낸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의 원고를 토대로 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한 여권 원로는 “DJ가 모두의 힘을 모았기 때문에 IMF 위기도 이겨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원동력이 없어 보인다”며 “DJ가 당선 후 통합 행보를 펼쳤듯, 결국 집권세력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야권 원로는 “DJ의 통합정신은 당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대들던 노무현·이해찬·정대철을 키워준 것도 DJ”라고 전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 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요즘 DJ가 더욱 떠오르는 건 정치가 너무 퍽퍽해졌기 때문”이라며 “DJ 정신을 계승하겠다면서 오히려 상대의 약점을 공격해 권력을 유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강보현 기자 kang.bo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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