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킴’ 안경선배 “올림픽은 몇 번이든 욕심나는 무대죠”
“영미! 영미!”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연장 접전이 펼쳐졌던 일본과의 4강 플레이오프.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 ‘팀킴’의 주장 김은정(34)이 42.07m 시트(컬링 빙판) 위로 마지막 스톤을 던졌다. 하우스(원형 표적)를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득점이 불발되거나 실점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 김은정은 연신 동료 김영미(33)를 불렀다. 정확한 위치에 스위핑을 지시하기 위한 그의 애탄 외침에 전 국민도 함께 숨을 죽였다. 결국 첫 올림픽 무대에서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사상 첫 결승 진출에 이어 은메달까지 따낸 팀킴은 그해 평창의 겨울을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궜다.
그 영광의 순간으로부터 어느덧 6년이 흘렀지만 팀킴의 유명세만큼은 여전하다.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을 앞두고 강원도 강릉중학교에서 열린 성화 투어 현장에선 2018년 평창의 열기가 한 번 더 재현됐다. 당시 기억이 어렴풋할 15살 남짓의 청소년들이 강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마지막 성화 주자로 ‘안경선배’ 김은정이 등장하자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각종 ‘밈’으로 수차례 회자되었던 터라 앳된 얼굴의 청중들 사이에서도 팀킴이 펼친 명승부를 모르는 이는 없는 듯했다.
어린 시절 팀킴을 롤 모델로 삼고 컬링에 입문한 ‘팀 의성’도 이번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에서 첫 선을 보인다. 공교롭게도 대표팀엔 김은정의 모교 후배들이 둘이나 포함돼있다. 4인조 혼성 종목에 출전하는 장유빈(17), 이소원(17)은 팀킴의 뒤를 잇기 위해 막바지 담금질에 돌입하며 “선배들이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은 링크장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들 ‘컬링 꿈나무’처럼 팀킴 역시 전열 정비에 한창이다. 2026 밀라노동계올림픽까지 긴 레이스를 앞두고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다시 신발끈을 조여매고 있는 김은정을 지난해 12월 28일 강원도 강릉시청에서 만났다.
“특별히 소질이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컬링을 시작한 지도 어언 16년 차에 접어든 김은정. 그에게 선수 생활의 첫 발을 뗀 의성여고 시절에 대해 묻자 예상 밖의 겸손한 답이 돌아왔다. 방과후 체험 활동으로 우연찮게 브룸을 잡은 김은정은 팀킴의 현재 멤버이자 동문이었던 김영미, 김경애(30), 김선영(31)을 손수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팀 창설 비화와는 달리 운동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그에게 확신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김은정은 “결손이 생겨서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온 것일 뿐, 다른 애들보다 잘나서가 결코 아니”라며 “버티는 힘이 좋았던 게 아닐까 싶다”고 고개를 저었다.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남다른 재능보다는 ‘책임감’이다. 컬링은 4명이 포지션을 나눠 한 팀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팀스포츠다. 이따금 훈련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김은정이라고 없었던 게 아니지만, 그는 그때마다 멤버들을 떠올렸다. 김은정은 “이 팀을 모은 이상 같이 길을 걷자고 약속한 셈”이라며 “한두 번의 실패로 그만두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컬링을 할 때 느끼는 재미와 성취감도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다. “스톤이 맞았을 때 소리나 빙판을 가르며 슬라이딩할 때 기분이 좋아요. 샷이 성공해서 성취감을 맛보는 게 재밌기도 하고요. 10엔드가 진행되면 많게는 20번도 성공할 기회가 있는 거 잖아요. 그런 것들이 소소하게 재미를 주는 것 같아요.”
김은정의 포지션은 게임 전체의 전략을 세우고 빙판 점검하는 ‘스킵’이다. 팀의 리더 역할로, 제일 마지막에 스톤을 투구해 승부를 결정짓는다. 김은정은 “최악의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하는 포지션”이라고 설명했다.
주장과 스킵의 무게가 이중으로 가해져 부담감이 크지는 않을까. 안경을 쓴 채 한껏 근엄한 표정으로 경기에 임해 ‘안경선배’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에게도 불안감은 있기 마련이다. 김은정은 “사실은 노력해서 만든 포커페이스”라며 떨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평정심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김은정은 언젠가부터는 “마인드컨트롤을 성적보다 중요한 목표로 삼게 됐다”고 밝혔다. 요새는 멤버들이 가정을 꾸리면서 경기장 밖 일상도 많이 달라졌다. 김은정 또한 훈련이 끝나면 5살 아들의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엄마가 됐다. 그만큼 꺼내야 할 내면의 이야기도 층위가 넓어진 셈이다. 김은정은 “전문적인 수업을 받으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기술적으로 다스리고 불안감을 팀원들에게 터놓는 방법도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16년 동안 멤버 변화 없이 팀을 지킬 수 있던 비결도 부드럽고 잔잔한 걸 추구하는 그의 가치관과 맥이 닿는다. 김은정은 “제일 연장자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많이 놀림 당하는 캐릭터”라며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 더 나서서 챙기려고 하거나 먹고 싶은 게 보이면 슬쩍 갖다 줬던 게 리더십으로 다가서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꾸준한 성적도 팀을 끈끈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잠깐 기복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성적 부진이 3시즌 이상 지속된 적은 없다. “결국에 이적은 ‘내 실력이 뛰어난데 이 팀에선 어렵겠다.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정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 하나 ‘내가 잘나서 거둔 성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함께 해야 좋은 시너지가 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시아계 컬링 선수들의 은퇴 시기는 30대 중후반쯤이다. 올해 만 34살인 김은정 역시 나이로만 따지면 은퇴 마지노선에 가까워져 있지만, 선수로서 가진 열정이나 욕심은 아직 끝물이라고 볼 수 없다. 2026 밀라노동계올림픽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선수로서 올림픽은 어떤 의미인지 묻자 김은정은 “내 인생의 결과물”이라고 답했다.
일단 ‘3년 연속 올림픽 무대 진출’이라는 타이틀이 걸려있다. 김은정은 “올림픽은 몇 번을 가든 당연히 욕심이 나는 무대”라며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팀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과거에 한국은 늘 꼴찌만 하던, 순위를 깔아주던 팀이었어요. 2018 평창올림픽에서는 인식이 달라졌죠.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위협적인 팀으로 여겨져서 상대가 분석할 수밖에 없는 팀이 되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은 그걸 조금은 이룬 것 같아요.”
어렵사리 출전권을 따냈던 지난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선 빈손으로 돌아와 아쉬움이 크게 남기도 했다. 당시 4강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며 대회를 마쳤던 팀킴은 평창에서 딴 은메달이 “개최국 특혜였다”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김은정은 “이번에는 꼭 메달을 따서 그때만 반짝 잘했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태극마크를 다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다. 2018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국내 컬링계 실력이 상향평준화됐고, 과거부터 이어진 경기도청과의 라이벌도 한껏 팽팽해진 상태다. 2023년 연말까지 그랜드슬램과 전국 동계체전 선발전에 출전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한 팀킴은 이달 초 다시 전지훈련과 투어 출전을 위해 캐나다행 비행기에 오른다.
2024 강원동계청소년올림픽에 나설 후배들을 향해 격려도 잊지 않았다. 김은정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 자체로도 성장”이라며 “굳이 성장하려고 노력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즐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강릉=글·사진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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