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주님은 우리에게 ‘와서 죽으라’ 하신다

신상목 2024. 1. 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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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반의 미국 상황입니다. 당시엔 두 부류의 20대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전쟁터로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발발한 전쟁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1951년 6월 30일 당시 미 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선별징집확대법안을 통과시켜 예비군과 주 방위군을 개별 또는 부대 단위로 21개월간 현역 연방군으로 소집할 권한을 부여했고, 선별 징병제에 따라 5만명의 장정들을 소집해 보충했습니다.

또 한 부류는 남미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원시부족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미신과 병마, 살인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다양한 부족선교회들이 활동했고 여기엔 신실한 청년들이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이번 주는 에콰도르 부족을 향한 선교에 나섰다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미국 청년 5명 이야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 젊은이들이 너무 무모했으며 비극이며 악몽이라고 비판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추적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이 선교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 준비도 철저하게 했습니다. 스페인어와 부족어를 배웠고 응급의료 지식도 쌓았습니다. 저마다 선교회에 소속돼 에콰도르의 다른 부족에게 들어가 복음을 전했고 최종 목적지인 아우카(야만족이라는 뜻으로 나중에 ‘와오다니’라는 원래 부족 이름으로 불림) 부족 선교를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들을 위해 ‘이생에 이것 말고는 다른 귀한 일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감히 국내에 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과거처럼 원시부족 형태의 미전도종족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슬람권과 공산권 지역엔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 못하니 하나님은 심지어 그 권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주해 우리 이웃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선교의 하나님은 여전히 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갈 주님의 일꾼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와서 죽으라’ 말씀하십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에는 개신교 선교운동의 시초가 된 독일 경건주의와 그 이야기도 살펴봤습니다.

에콰도르 5인 선교사들의 죽음
1956년 1월 8일 미국의 청년 선교사였던 짐 엘리엇, 네이트 세인트, 로저 유더리안, 에드 맥컬리, 피트 플레밍은 에콰도르 정글의 호전적 부족인 아우카족(와오다니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갔다가 원주민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들 선교사는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떻게 원주민 선교를 준비했는지, 그리고 끔찍한 학살 장소였던 쿠라라이 강에서의 사건, 아우카족의 변화, 남겨진 사람들의 근황 등은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출간한 ‘영광의 문’에 상세히 담겨 있다. 우리 시대의 고전인 이 책은 무모한 선교라며 비난하는 세간의 인식을 단번에 불식시키며 이들의 희생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저자가 쓴 ‘전능자의 그늘’은 짐 엘리엇에 집중한 책이다.

이들은 꽤 오래전부터 선교사의 마음을 품었고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청년 선교사들에겐 타부족과 달리 다가갈 수 없었던 아우카부족을 향한 간절한 사랑이 있었다. 하나님 없이 멸망하는 그들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 열전’의 저자 루스 터커는 이들의 이야기를 ‘순교’ 주제의 섹션이 아니라 ‘믿음 선교’ 라는 주제의 섹션으로 분류했다.


당시 신생 선교단체들은 원주민 선교에 중점을 뒀다. 찰스 다윈이 ‘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그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루스 터커는 “선교사들에게는 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요,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값 주고 사신 소중한 영혼이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선교사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자 했으며 1956년 에콰도르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짐 엘리엇과 네 청년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평가했다.

아우카 선교사역은 하나의 선교회가 구상한 계획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만들었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선교를 향한 소명을 키웠고 에콰도르의 가장 무시무시한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했다. 그들은 에콰도르에 3~7년 전부터 들어와 스페인어는 물론, 현지 부족어 등을 배웠고 다양한 부족 사역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항공선교회 조종사로 일했던 네이트 세인트는 7년간 에콰도르 사역을 하고 있었고, 로저 유데리언은 복음선교연합에서, 짐 엘리엇과 피트 플레밍, 에드 매컬리는 열방기독교선교회 소속이었다. 5인의 선교사들은 아우카 부족과 접촉할 계획을 세우면서 10년 전 볼리비아에서 있었던 부족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살해 사건을 연구하고 대비하기도 했다.

짐 엘리엇은 1949년 휘튼대학을 졸업하고 에콰도르 선교사로 사역을 준비했다. 그의 열정은 워싱턴대 졸업생 피트 플레밍에게 영향을 끼쳤다. 52년 두 사람은 에콰도르로 향했다. 같은 해 에드 매컬리도 아내와 함께 도착했다. 매컬리도 휘튼대 출신이었으며 재학 시절엔 스타급 풋볼 선수였다. 네이트 세인트 역시 휘튼대 동문으로 48년부터 에콰도르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로저 유데리안은 2차대전에 참전한 낙하산병 출신으로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고 53년 에콰도르에 들어왔다.


아우카 부족은 당시 남미에서 가장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1943년 8명의 셸 정유사 직원이 이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로마가톨릭 예수회 사제였던 페드로 수아레즈가 원주민의 창에 맞아 사망했다. 19세기 후반엔 천연고무 채집자들이 정글 지역에 들어와 원주민들을 들쑤셔 놓았다. 가옥 약탈, 방화, 강간, 고문을 일삼고 부족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한다. 무려 50년간이었다. 아우카족이 백인을 전혀 좋아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피트 플레밍은 그의 일기에서 “아우카족 문제는 심각하고 엄중하다. 사람을 살해하고 죽이되 증오를 품고 온 시신을 절단내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부족”이라고 썼다. 하지만 5인의 선교사들은 선교적 도전과 매혹을 느꼈고 그런 부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무릅쓰지 못할 위험이란 없다고 확신했다. 특히 짐 엘리엇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우카족 구원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서약했다. 5인 선교사 모두 하나님의 인도를 기대했고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우카족을 향한 첫 돌파구는 55년 9월 네이트 세인트가 단발 비행기를 타고 아우카족 구역을 지나면서 그들의 마을을 탐지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정기 방문을 했다. 정기방문이란 그들을 위한 선물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선물 상자엔 벌채용 칼이나 나이프, 의류, 실물 크기 선교사 사진 등이 있었다. 그들의 답례도 있어서 앵무새나 땅콩, 불에 그을린 원숭이 꼬리도 주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이를 좋은 사인으로 보고 일을 서둘렀다. 1956년 1월 3일 아우카족 쿠라라이 강변 모래사장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렇게 사흘째 부족민과 만났고 인사를 나눴다. 선교사들은 또 선물도 전했다. 또다시 찾아간 8일은 주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다음 주 수색대는 심하게 부패한 네 구의 시신을 강에서 끌어올렸고 어떤 시신에는 야자나무로 만든 창이 그대로 여전히 꽂혀 있었다. 에드 매컬리의 시신은 강물에 떠내려간 것으로 추정됐다.

5인의 선교사 미망인들은 이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이건 비극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사에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고 말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은 이들 미망인에게 힘이 되었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지만 아우카족 선교는 멈추지 않았다. 항공선교회 조종사들은 선물 바구니 투하를 재개했고 2년이 지나서야 부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58년 9월 레이첼 세인트와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부족인들과 만났고 이로써 본격적인 아우카족 선교가 시작됐다. 순교한 남편들의 뒤를 이어 부인들이 선교에 나선 것이다.

이후 아우카족 부족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10년 후엔 5명의 선교사를 살해한 장본인 ‘키모’가 부족 최초의 목사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또 순교한 선교사들의 자녀 중 2명이 아버지가 죽은 강가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엘리엇의 딸은 아우카족과 함께 살기도 했다. 92년에는 현장에서 아우카족어로 된 신약성경 봉헌예배가 드려지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전능자의 그늘’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은 짐과 그와 함께 죽은 이들을 영웅으로, 순교자로 칭송했다.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그토록 크게 다른 일이란 말인가. 후자는 전자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은 그 자체가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날마다’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목숨을 버릴 때 우리는 그것을 도로 얻는다.”

미국 대통령들이 인용했던 청교도 설교
미국이란 무엇일까. 거대한 땅덩어리일까 아니면 독립선언서나 헌법과 같은 건국 문서에 명시된 어떤 이상일까. 미국에서는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종종 청교도들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찾았다. 바로 1630년 매사추세츠만(灣) 초대 청교도 주지사였던 존 윈스롭이 말했던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될 것”이라는 유명한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과거 링컨 대통령을 비롯해 현대에 와서 레이건, 클린턴, 부시, 오바마 대통령이 모두 인용하며 국가적 화합과 정신을 일깨울 때마다 사용했다.

존 윈스롭은 1588년 1월 12일 영국 서퍽에서 태어났다. 1602년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620년 런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된 윈스롭은 신앙이 매우 두터웠고 칼뱅주의를 기반으로 한 청교도 신앙을 열심히 신봉했다. 윈스롭은 1630년 영국 청교도들을 이끌고 미국 매사추세츠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로 이주해, 매사추세츠 초대 주지사를 시작으로 총 12차례나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1630년 당시 미국으로 향하면서 ‘아벨라’라는 배에 탔는데 거기서 ‘기독교 자선의 모델’(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전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한 청교도들의 생활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하나님 언약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설교에서 그는 ‘언덕 위의 도시’(A City on a Hill)를 언급하면서 미국은 하나님의 선민인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정이 교회이며 사회 공동체도 교회라는 인식을 펼쳤다. 이 같은 교회의 사명은 사회언약, 국가언약으로 발전됐고 모든 공동체 일원은 개인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경건주의, 개신교 선교에 기여
1635년 1월 13일 독일 경건주의(Pietism) 창시자 필립 야콥 스페너(P. J. Spener)가 라폴슈타인에서 태어났다. 중생과 거룩한 삶에 대한 그의 강조는 독일 루터교회와 미국 복음주의를 비롯한 후대의 많은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경건주의는 당시 30년 전쟁의 여파와 정통파의 판에 박힌 듯한 형식적 신앙생활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복음의 생명력을 잃은 상태에서 나왔다. 개인적 신앙과 종교적 체험에 가치를 두게 했다.

1675년 스페너가 6개조의 신앙 개혁안을 담은 ‘경건한 욕망’을 발행했다. 그는 이 개혁안을 좇아 경건회를 만들고 영적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기도와 성경 연구, 정통 교리 전수, 충성스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육성하는 일 등이 그것이었고 이는 경건주의 운동의 모체가 됐다.


루터교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스페너는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했다. 목사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았고 공무원으로 간주됐다. 설교와 성례 집례에 대부분 만족했다. 하지만 스페너는 자신의 임무가 교구민들의 개인적 신앙 육성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회하면서 경건의 모임이라 부른 성경공부 및 경건회를 시작했다. 5년 뒤 그 결과물이 ‘경건한 욕망’이었다.

스페너는 이 책에서 루터파의 만인제사장설을 견지했고 평신도와 성직자 간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동 책임을 강조할 것을 제안했다. 또 목회자와 신학자가 되기를 원하는 후보자들이 깊은 개인 신앙을 갖춘 ‘참 기독교인인지’ 확인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교란 설교자의 지식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므로 설교는 학구적이며 논쟁적인 어투를 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칭의를 비롯해 성화도 강조했는데 이는 루터파와 달리 칼뱅주의에 더 가까운 가르침이었다. 스페너는 루터주의가 성화의 필요성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며 종말이 가깝다고 봤다.

스페너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는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였다. 그는 스페너와 계시록 해석은 달리했지만 나머지는 스페너의 가르침에 동조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의 기쁨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쁨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할레대학을 설립해 경건주의 운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할레대학에서는 철저한 참회와 은총 및 중생을 강조한 엄격한 경건주의 훈련을 실시했고 병원, 출판사 등도 설립했다. 독일 개혁파 경건주의의 뛰어난 인물인 람페는 그의 찬송과 설교, 저서들을 통해 경건주의 신앙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경건주의 운동이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분야는 세계 선교였다. 당시엔 복음전파의 명령이 사도들에게 국한된 것으로 이해했다. 초기 경건주의자들은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학교와 보육원 등을 세우며 동료 신자들의 궁핍함을 도왔다. 하지만 세계 선교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707년 경건주의자를 존경했던 덴마크 왕이 인도에 있는 그의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으나 적임자를 찾을 수 없자 할레대 프랑케에게 제자 두 명을 인도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파송된 사람이 바톨로메우스 지덴바르크와 하인리히 플루트차우로 이들은 인도에 트란케바르 선교소를 세웠다. 이들은 독일로 편지와 보고서를 보냈고 이 내용은 경건주의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할레대는 곧 선교사 훈련의 중심지가 됐다. 덴마크에서도 왕의 지원과 경건주의 지도자들의 인도 아래 라플란드와 그린란드에 파송될 선교사들을 훈련하기 위한 선교학교가 설립됐다.

경건주의는 스페너의 제자 중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진젠도르프는 독실한 경건주의자 부모에 의해 할레대로 보내졌고 프랑케 밑에서 수학했다. 이후 드레스덴 궁정에서 근무하면서 그의 인생을 바꾼 모라비아 교도를 만났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고향 모라비아를 떠난 후스파였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땅에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모라비안들은 그곳에 헤른후트공동체를 세웠고 이 공동체에 매료된 진젠도르프는 그들과 합류한다.

1731년 진젠도르프는 루터파 선교사가 개종시킨 에스키모인을 만나면서 그의 여생을 지배할 선교적 열정에 사로잡힌다. 헤른후트공동체 역시 같은 비전을 갖게 되면서 1732년 카리브에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몇 년 후에는 아프리카 인도 남미, 북미에서도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펜실베이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 공동체를 세웠다. 200명의 피난민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20년이 못 되어 100명 이상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는 200년 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모라비안공동체는 이후 존 웨슬리에게도 영향을 줬다.

퀘이커교 창설자 조지 폭스 별세
1691년 1월 13일 친구들의 모임(퀘이커교)의 창립자 조지 폭스(1624~1691)가 별세했다. 폭스는 성공회를 떠나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내면의 빛’에 의지했다. 퀘이커교는 1647년 폭스가 창설한 프로테스탄트의 한 분파로 영국과 식민지 미국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다.

조지 폭스는 11세에 구두방, 목축업자 집에서 일하며 가난하게 지내 학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진실하고 경건하며 성실했다. 19세에 제화공 도제들의 방탕한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면서 위로부터의 조명을 얻기 위해 각종 종교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또 성경공부에 몰두해 성경을 거의 암송했다고 한다. 그는 성직자나 기존 교회가 지닌 형식이 없어도 내면의 빛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 성령의 감동을 중시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다 절망하기도 했고 성령 체험을 통해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다양한 교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전통적 교회에 도전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속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들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는 봉급을 받기 위해 일하는 목사들은 참 목자가 아니라 삯군이라 봤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 예배 순서를 성령의 자유를 방해하는 인간의 발명품으로 생각했다. 폭스는 이 모든 것에 대항해 ‘내적 빛’(inner light)를 주장했다. 내적 빛이란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씨앗이며 우리가 하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따라가야 할 참 길이라고 했다. 반면 당시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경험을 부인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내적 빛이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 이성’이 아니며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련의 도덕적 원리도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이 내적 빛에 의해 성경을 믿고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1647년 폭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빛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배 시간에도 인도자 없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처소에서 침묵과 명상을 했다. 예배 형식이 성령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는 변화된 성스러운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노예, 전쟁,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사회 개혁에 주력했고 금주와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다. 모든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내적이며 정신적인 경험을 중시했다.

그의 이런 가르침과 방식은 많은 반발을 불러와 여러 차례 투옥됐지만 그의 순수한 열정과 진실한 면모는 당시 많은 청교도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급증했고 이들은 스스로를 ‘빛의 자녀들’이라 불렀다. 폭스는 ‘친구들’이라는 명칭을 선호했고 이것이 1652년 ‘친구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라는 퀘이커 공동체가 됐다. 하지만 폭스의 추종자들이 종교적 감정을 이기지 못해 떠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들을 ‘떠는 자’(Quaker)라 부르며 조롱했고 훗날 이것이 교파 이름이 되었다. 실제로 폭스는 진리의 말씀을 듣거든 ‘떨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1658년에는 영국 도처에 ‘친구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그러나 각지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혀 1661년까지 거의 3000여명이 투옥되기도 했다. 상류층과 권력자들은 이들을 광신자 취급을 했다. 십일조 세금을 거부하고 자신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만 모자 벗기를 주장하는 이들을 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층민의 복종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무례하고 용납할 수 없는 불복종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폭스는 여러 차례 두들겨 맞았고 그의 부인 역시 여러 해를 감옥에 수감돼야 했다. 폭스는 설교를 중단시켰다고 투옥됐고 어느 때는 신성모독죄로 잡혀갔다. 어느 때는 국가에 대한 반란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선교열은 대단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서인도 제도, 독일, 오스트리아, 홀랜드 등지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1656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를 창설한 윌리엄 펜에 의해 미국에 퀘이커교가 전파됐다. 우리나라에는 1955년 2월에 전파됐으며 함석헌 선생이 대표적 인물이다.

교회사가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당시엔) 교리에 관한 논쟁이 끝없이 이어졌고 기독교인들의 편협함이 가열되면서 많은 이들이 순수한 신비적 종교로 도피하려 했다. 교리교육은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던 상류층에게만 유리했다”며 “17,18세기 신비주의 운동은 편협한 교조주의를 좋아하지 않는 지식인들, 그리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이 신비주의 운동 안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고 설명했다.

<참고 서적>
[영광의 문]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윤종석 옮김/복있는사람
[현대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엄성옥 옮김/은성
[교회용어사전] 가스펠서브 기획 편저/생명의말씀사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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