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그 많은 식자(識者)는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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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 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황현은 우리에게 '매천야록'이라는 책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로, 그가 전남 구례에서 자결하기 전에 쓴 절명시 중 하나다.
하지만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 세상에서 '식자 노릇 하기 참으로 어려웠던' 선비는 자신이라도 글 읽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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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 하기 참으로 어렵구나.”
백여 년 전 ‘식자(識者)도 권력’이라고,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매천 황현의 시다. 황현은 우리에게 ‘매천야록’이라는 책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로, 그가 전남 구례에서 자결하기 전에 쓴 절명시 중 하나다.
시를 보고 짐작하겠지만, 결국 나라가 망해 버렸다. 그것도 같은 민족에 의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복속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정말로’ 나라가 망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들 중에는 누구도 망국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황현은 그러한 나라의 마지막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배부른 권력자들이 책임지지 않으니 그나마 책을 읽은 선비라도 책임을 다해야 했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백성들 볼 낯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황현이 남긴 유언의 일부다. 물론 선비를 기른 지 오백 년 된 나라에서 목숨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다. 경술국치 당일부터 이듬해까지 관료나 의병장 등의 순국이 잇따랐다. 하지만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는’ 세상에서 ‘식자 노릇 하기 참으로 어려웠던’ 선비는 자신이라도 글 읽는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다. 유언에 쓴 것처럼, 그는 망한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일생 동안 그는 부패하고 썩어빠진 조정의 관직에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은 자신과 같은 선비들에게만 권력을 쥐어준 양반 사대부들을 위한 나라였다.
설령 나라를 망하게 만든 사람들이 성리학 일원주의를 고집하는 사대부들, 세도정치에 날 새는 줄 모르던 특정 가문의 양반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려는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갑자기 주어진 권력의 맛에 취한 왕실의 친인척들이었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지만, 글을 알아 세상의 이치를 깨친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는 다해야 했다. 죽어야 사는 삶, 그의 마지막 고민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식자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벼슬자리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식자들이다. 대통령실이나 내각, 국회 할 것 없이 속칭 ‘식자입네’ 하는 양반들이 득시글거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황현같은 식자를 찾는 건 더 어려워졌다. 황현처럼 ‘죽어야 사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라가 망해가는 줄 모르고 이념에 몰두하는 권력자들이 있고, 압수수색에 날 새는 줄 모르는 특정 집단과 이를 부추기는 언론의 카르텔이 있고,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있지만, 이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국민들 볼 낯을 걱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식자 노릇 하기 참으로 쉬운’ 나라다.
황현의 유언을 뒤집어 보면, 조정에 벼슬한 자들에겐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있는 셈이다. 굳이 서양식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쯤 되겠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만 탐하는 이 땅의 노블레스들은 그에 상응하는 오블리주를 잊은 지 오래다. 문제는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 대환장파티의 끝은 어디일까.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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