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국회의원 김예지가 꿈꾸는 바다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그냥 김예지 씨가 안내견과 국회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 김예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제안한 의원과의 첫 만남 자리에서였다. 자신이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존재, 적당한 구색 맞추기 용도인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예지는 순응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부딪칠 때는 부딪쳤고, 도전할 수 있을 때는 도전했다. 김예지가 음악을 할 때, 유학을 갈 때, 국회에 입성할 때, 주변 사람들 중에는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예지는 모두 자신을 걱정하는 좋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걱정하는 분들을 온 힘을 다해서 반대했다.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는 국회의원 김예지의 생각을 담은 글이다. 삶, 장애, 인권, 정치, 공동체 등에 대한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김예지는 단단하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불편하고 힘들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자신만의 고통과 괴로움을 직면한 채 매일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김예지는 숙명여대 피아노과 일반전형에서 수석 입학을 했고, 미국 존스홉킨스대 피바디 음악대학원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석사, 위스콘신대 매디슨 캠퍼스에서 피아노 연주·교수법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피아니스트다. 2020년 전국 장애인 동계체육대회 여자 크로스컨트리스키 부문에서 은메달, 바이애슬론에서 동메달을 딴 스포츠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이다.
나는 지금도 피아니스트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중략) 내가 피아니스트로서 어떤 곡을 치더라도, 그건 오직 나 김예지만의 연주가 된다. 같은 곡도 누가 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무슨 곡을 선택하더라도 나만의 주관적인 색깔, 고유성을 담아 연주할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게 피아노가 알려준 가장 중요한 진실이다.(63~64쪽, 피아노는 내게)
우리 엄마도 내가 중학생 때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마도 장애인을 키운다는 무게감에 짓눌려 계시다가 어느 순간 폭발했던 것이리라. 그때 나는 내 무릎 위의 생채기처럼,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채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그 끝은 내가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중략) 내 주위에는 부모에게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장애인이 없다. 거의 모든 장애인의 경험이 다 비슷할 것이다. 이런 사안 앞에서 부모가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식의 관점을 절대 가지면 안 된다. 그건 완전히 틀린 관점이니깐. 부모의 절절한 심정은 절절한 심정이고, 살인은 살인이다. 어떤 상황에도 살인은 '이해'나 '공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단 '동반자살' 같은 말부터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81~82쪽, '오죽하면'이라는 잔인한 말)
나는 2023년 7월17일 제헌절 경축식에서 슈만의 '헌정(Widmung)'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이날 행사의 음악감독님은 원래 다른 곡을 제안했는데, 그 분을 설득해서 이 곡을 선정했다. (중략) 이 노래는 슈만이 자신이 사랑하는 클라라에게 바친 것인데, 본래는 노랫말이 있는 가곡이었다. 가사가 아주 절절하다. 그대는 나의 영혼, 그대는 내 심장, 그대는 나의 기쁨, 오 그대는 내 고통이여…." (중략) 슈만에게 클라라가 그랬듯, 여기 입법기관에 국민의 대표로 온 사람에게 국민이 전부가 아니라면 무엇이 전부란 말인가? 우리는 '국민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117~118쪽, 나의 클라라는 누구인가)
미국 장애 학생의 90% 이상은 일반학급에서 일부 또는 전체 수업을 듣는다. 말하자면, 굳이 '통합'하는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제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미국뿐이랴. 대다수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많은 나라들이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 섞여 수업을 받게끔 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학교에서 분리가 시작되면,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전 생애주기에 걸쳐 분리와 차단과 배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140~141쪽, 학교가 중요하다)
정제된 언어는 상호 신뢰의 기본이다. 더욱이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말을 쓰는 건 직무유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이 모여 정치의 수준과 품격을 떨어뜨린다.(164쪽, 저열한 말을 쓰는 이유)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쉬워 보여도, 이건 모두가 자기 삶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한민국 정치가 왜 그토록 무례하고 몰염치한 공간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저 말부터 떠오른다. 앞에서 나는 이 공간이 '네가 모르는 게 문제'라는 입장과 태도에 중독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너는 모른다'라고 상대를 손가락질하는 일엔, '나는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 나는 그런 태도에서 '자신이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발견할 때가 많다. 일찍이 입신하고 뛰어난 두뇌로 주위의 칭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오만함에 찌든 그들은 강하고 가파른 언어를 즐겨 쓰고, 자신이 틀렸다는 의심을 조금도 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단언한다. 그들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움이나 반성적인 태도가 전혀 없다.(178~179쪽,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 위해선)
자극적인 말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지지층을 결집하고, 표가 많아 보이는 집단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척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에게 선명한 낙인을 찍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면 온라인에서는 혐오로 점철된 언어들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언론은 이러한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말들을 가감 없이 보도하는 중이다. 표를 얻어 선출직으로 등용되어야 하는 정치인들은 중재에 나서길 꺼린다. 그렇게 합리적인 균형감각을 발휘하는 일은 별반 눈길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말하건대, 그래서는 안 된다.(180~181쪽, 악마화라는 방아쇠)
성선설과 성악설을 굳이 구분한다면, 나는 성악설을 믿는 편이다. (중략) 그렇지만 이런 나도 내가 주위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는 존재인지를 알고 있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그 사소하고도 섬세한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다. (중략) 사람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우린 그만큼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주고받음을 통해 조금 더 선하고 이타적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에겐 사악하고 동물적인 씨앗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성악설을 믿어도 인간이 악한 존재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곤 생각하지 않는다.(224~226쪽,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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