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침략... 끝내 고려를 꺾지 못한 거란의 선택
[김종성 기자]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거란족은 한민족의 만주 지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서기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사건으로 인해 한민족은 만주 지배권을 잃을 수도 있었다. 뒤이어 발해가 건국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698년에 건국된 발해에 의해 한민족의 만주 지배가 이어진 것은 대조영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과 싸워 만주를 지켜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거란족의 도움도 한 몫했다.
고구려가 사라지고 발해가 떠오르던 시기에 중국을 이끈 인물은 측천무후로도 불리는 무측천이다. 처음에는 당나라 태종(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결국 그 며느리가 된 무측천은 고구려 멸망 당시에는 당고종의 황후였다.
그는 형식상으로는 황후였지만,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였다. 655년에 황후가 된 그는 고구려 멸망 이전에 실권자가 됐다. 그랬다가 690년에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건국시조가 되는 주나라를 세웠다.
무씨가 세운 주나라라고 해서 '무주'로도 불리는 이 나라는 705년까지 15년간 유지됐지만, 중국왕조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중국 역사학계는 그 15년 동안에도 당나라가 유지됐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
ⓒ KBS2 |
대조영이 싸운 중국측 당국자는 바로 그 무측천이다. 대조영은 무측천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 고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이때 대조영 편에 서서 무측천과 싸운 민족이 거란족이다.
대조영이 무측천을 상대할 때 거란족도 무측천에 맞섰다. 이렇게 거들어준 결과로 대조영은 손쉽게 발해를 세웠다. 이로 인해 거란족은 불익을 당했다. 무측천과 연대한 돌궐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대조영을 도운 대가를 그렇게 치른 셈이다.
그처럼 7세기 후반에 한민족을 도왔던 거란족이 10세기 초반에는 한민족을 압박하는 세력으로 바뀌었다. 872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야율아보기가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에 부족을 통일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우면서, 이 유목민은 발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전의 발해 군주들은 한반도와 중국대륙만 신경을 쓰면 됐었다. 그랬던 것이, 거란족이 강성해지면서 몽골초원의 거란족까지 함께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발해의 운명을 책임진 군주가 대인선이다. 그는 거란족은 강성해지고 발해는 쇠약해지는 위기 국면 속에서 약 20년간 발해를 지켜냈다.
이 점은 송나라(남송) 사람인 섭융례가 엮은 <거란국지>에서도 확인된다. 야율아보기 편인 이 책의 태조본기는 924년 상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때 동북 지역의 이민족들은 모두 복종했지만 유독 발해만큼은 굴복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상황을 종결지은 것이 926년 최후의 전쟁이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요나라 성종(요성종)이 1010년에 그랬던 것처럼,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도 926년에 선전포고를 한 뒤 자신이 직접 말에 올라 발해 침공을 지휘했다. 그가 이 전쟁에 명운을 걸었다는 점은 그 자신뿐 아니라 부인과 태자까지 참전시킨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926년 전쟁의 결과는 훗날의 사건인 조선과 청나라의 병자호란을 연상시킨다. 패배한 인조 임금은 천민의 옷으로 인식되는 푸른 옷을 입고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의 모랫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유득공의 <발해고>에 따르면, 대인선은 하얀 옷에 새끼를 메고 양떼를 이끌면서 도성 남문을 나왔다. 이는 군주의 지위를 버리고 평민으로 살겠다는 표시였다. 발해의 마지막 군주는 그런 방식으로 거란족에 항복했다.
거란족이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일은 이 유목민족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발해를 멸망시켜 몽골초원과 만주의 지배자가 된 거란족은 936년에 연주·운주 등의 16주를 확보해 중국 진출의 발판을 만들었다.
연운 16주로 약칭되는 이곳은 오늘날의 베이징 지역까지 아우른다. 몽골초원 국가가 이곳을 확보하면 북중국 진출이 용이해진다. 거란족이 이런 요충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발해가 동쪽에서 거란족을 견제했다면, 거란족이 마음놓고 북중국으로 남하하기 힘들었다. 거란족이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뒤이어 북중국의 지배자가 된 것은 926년의 사건에 힘입은 바 크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993년에 거란족은 제1차 여요전쟁을 일으켰다. 지금 <고려거란전쟁>에 방영되는 것은 제2차 전쟁이고, 강감찬이 지휘하는 전쟁은 제3차 전쟁이다.
▲ KBS2 <고려거란전쟁> 관련 이미지. |
ⓒ KBS2 |
거란족이 북중국뿐 아니라 남중국까지 석권하려면 고려를 미리 제압해둘 필요가 있었다. 동남쪽의 고려를 눌러놓아야 마음놓고 남하할 수 있었다. 제2차 여요전쟁 때 요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공한 것은 그런 필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거란족은 고려를 끝내 꺾지 못했다. 고려보다 훨씬 큰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 진출의 토대를 닦은 거란족은 발해보다 훨씬 작은 고려와의 전쟁에서는 결국 실패했다. 제1차 전쟁 때는 외교관 서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철군했고, 제2차 전쟁 때는 '돌아가 계시면 저희 군주가 친히 찾아가 알현하겠다'는 친조(親朝) 약속을 받고 철군했고, 제3차 때는 귀주대첩에서 수공을 당해 참패했다.
제3차 여요전쟁 패전으로 커다란 손실을 입은 거란족은 고려에 대한 정책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 대한 정책을 전반적으로 수정했다. 무리한 팽창을 시도하기보다는 세력균형과 평화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대외정책을 전환했다. 덕분에 그 후로는 고려가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에 세력균형과 평화가 형성됐다.
그런 상태는 여진족 금나라가 새로운 광풍을 일으키기 전까지 대략 1세기 동안 유지됐다. 고려가 요나라를 꺾은 것이 그처럼 커다란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한민족과 거란족의 대결은 한민족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발해의 한을 고려가 어느 정도는 갚아준 셈이 된다. 발해는 꺾었지만 고려는 꺾지 못한 거란족은 무모한 침공 대신 안정적인 세력균형을 선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는 거란족에게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일깨워준 나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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