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과 똑같다…우크라 대반격 실패 부른 '그 오판' [Focus 인사이드]

남도현 2024. 1. 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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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일, 30㎞에 이르는 전선에 도열한 영국군 주축의 75만 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작전을 지휘한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는 40만으로 추정하는 독일군을 격멸하고 바폼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지난 1914년 9월 10일 독일군의 진격이 마른에서 막힌 뒤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으로 변했고, 그 후 2년 동안 양측 모두는 돌파에 실패하면서 희생만 급격히 늘어난 상태였다.

솜 전투 당시 진지를 박차고 나와 돌격하는 영국군. 사진 속 병사들 전원은 전사했다. 영국전쟁박물관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 6개월간 모든 작전을 중지하고 이번 공세만 준비했을 만큼 헤이그의 기대는 대단했다. 하지만 돌파는커녕 작전을 주도한 영국군만도 1만 9240명이 전사하고, 3만 5493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연합군의 사전 포격 효과가 예상보다 적은 반면 처음부터 열세인 독일군이 상황에 따라 미리 축성한 진지로 신속히 옮겨 다니며 효과적으로 이동 방어에 나선 결과였다.

유명한 솜 전투(Battle of Somme)의 첫날 모습이었다. 순수하게 군대끼리 교전을 벌여 하루 동안 입은 피해로 이는 사상 최대였다.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하루에 8만 명의 로마군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칼ㆍ활ㆍ창으로 싸우던 시기를 고려하면 신빙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솜 전투 첫날의 무시무시한 희생은 끝이 아니라 거대한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작은 숫자에 불과했다.

5개월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15만의 전사자를 포함해 60만의 피해를 보았고, 연합군 공세 저지에 성공한 독일군의 전사상자도 40만에 이르렀다. 이처럼 무서운 희생에도 연합군은 목표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는 15㎞ 정도 전진에 그쳤다. 하지만 이것도 전력이 열세였던 독일군이 전략적으로 지연 후퇴를 선택하면서 이룬 결과였다. 가장 큰 문제는 헤이그의 독단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점이었다.

솜 전투 영국군 전사자가 매장된 피프발 묘역. 전투 첫날 영국군에서만 역사상 최대인 2만여 명 가까운 전사자가 나왔고, 넉 달 동안 양측 합쳐 무려 100만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위키피디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7월 1일 저녁 참모들과 예하 부대장들은 공세 첫날 피해에 놀라 다른 방법을 택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헤이그는 같은 방법으로 공격할 것을 명했다. 결국 두 달 후 마지못해 생각을 바꿨지만, 이미 엄청난 희생이 일어난 후였다. 헤이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개전한 뒤 표준처럼 여겨졌던 ‘포격 후 보병 일제 돌격’ 전술을 고집했다. 이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놀랍게도 100년 전의 나폴레옹 전쟁 당시와 비교해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공격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돌진한 병사들은 100년 전과 달리 상대편이 난사하는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가장 기본인 소총만 해도 머스켓에서 후장식 볼트액션으로 바뀌었을 만큼 100년 동안 무기의 발달은 어마어마했지만, 작전은 그대로였고 결국 이런 모순은 엄청난 희생이 벌어진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솜 전투 공세 직전 촬영된 티프발 일대의 독일군 방어선. 이런 곳을 포격 후 보병이 돌격하는 식으로 공격을 반복하다가 영국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위키피디아


더 큰 문제는 2년 동안 고생했다면 뭔가 변화를 주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고, 헤이그는 오히려 같은 방식으로 공세를 반복하다가 사상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솜 전투 개시 두 달이 지난 뒤 포병이 보병의 진격 속도와 연동해 이동 포격하고 신무기인 전차를 투입해 변화를 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피해를 줄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노력을 안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최근에도 반복됐다.

대반격 초기 러시아군의 저항에 막혀 격파된 우크라이나군 M2 브래들리 보병전투차와 레오파르트 2A6 전차 등 잔해. EPA=연합


2022년 11월, 우크라이나가 헤르손시를 탈환하면서 러시아의 침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주도권이 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후 러시아는 수세적으로 행동했고,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의 대대적 지원에 힘입어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여름에 러시아군을 완전히 축출하려는 대반격에 나서겠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5일, 작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두 달 후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엄중하게 구축해 놓은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선의 모습은 놀랍게도 한 세기도 전에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처럼 지독한 참호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전선의 변동도 없이 인명피해만 극심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방어시설 축성 과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을 만큼 정보 획득 기술이 앞선 시대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한마디로 만용 때문이었다.

막사 위성에 찍힌 러시아군의 방어선. 참호와 용치, 지뢰로 보강했다. 이처럼 정확히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크라이나군은 마치 솜 전투 당시의 영국군처럼 정면 돌파만 시도하다가 공세가 좌절됐다. 로이터=연합


그동안의 분투에 고무돼 있어서였는지 우크라이나군은 철벽같은 방어선을 향해 정면 돌파만 고수하다가 제풀에 주저앉아 버렸다. 과거의 전쟁과 이를 지휘한 이들의 결정은 기록으로 남아 있기에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선택을 반복한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미래의 전쟁에서도 이런 실수와 오판은 틀림없이 계속될 것이다. 전쟁을 벌이는 주체가 항상 정확한 판단만 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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