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초인플레…거장은 예언했다 [홍기훈의 ‘세계를 바꾼 경제학 고전’]
시카고학파의 거장,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책을 저술했다. 그중 하나인 ‘화폐경제학’은 ‘자본주의와 자유’라는 책과 함께 프리드먼의 이름을 널리 알린 ‘명저’로 꼽힌다.
프리드먼은 1976년 소비 분석, 화폐 역사와 이론, 그리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대한 연구로 경제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했다. 조지 스티글러와 함께, 프리드먼은 케인스주의를 반박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주의를 지지한 신고전학파 경제 사상의 지적 리더 중 한 명이었다. 그 후에는 연구 주제를 합리적 기대 개념에 크게 기반한 새로운 고전적 거시경제학으로 전환했다. 프리드먼 영향을 받은 학자 리스트는 게리 베커, 로버트 포겔, 토머스 소웰, 로버트 루카스 주니어 등의 쟁쟁한 경제학자를 포함한다.
프리드먼은 각국 통화 정책의 기틀을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빠르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대비해 화폐 공급을 작은 규모로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시카고대에서 1977년 은퇴한 후, 1983년 경제학 명예교수가 된 프리드먼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보수주의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의 경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의 정치 철학은 ‘최소한의 정부 개입을 가진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한 설문조사에서 프리드먼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이어 20세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자로 뽑힐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망했을 때,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를 ‘20세기 후반 최고의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라고 묘사했다.
화폐란 무엇인가…그 본질을 논하다
프리드먼의 화폐경제학은 마치 소설처럼 쓰여 있다. 총 10개의 챕터 중 7개가 이야기 형식 사례다. 실제 프리드먼은 훌륭한 스토리텔러였다고 한다. 프리드먼의 ‘화폐경제학’ 이야기는 돌 화폐의 섬 사례로 시작된다. 남태평양 캐롤라인 군도에는 인구가 5000여명 남짓 되는 얍(Yap)이라는 섬이 있었다. 이 섬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바퀴 모양 돌이 화폐로 이용됐다. 얍섬에는 석회암이 없었기에, 섬 주민들은 굉장히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섬에서 석회석을 다듬어 가져왔다. 당연히 이 돌로 된 화폐를 만들고 가져오는 데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갔기에 이 돌들은 화폐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섬 주민들은 돌 화폐를 카누나 뗏목으로 운반해 집에 보관했다.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 없던 돌은 만든 섬에 그대로 뒀다.
이들은 실제 움직이기 어려운 돌을 이용해 물품을 거래했다. 그러다 보니 거래마다 돌을 옮기는 수고를 덜기 위해 소유권을 바꾸기만 하고 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뒀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돌 화폐로 구축된 화폐 경제 시스템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런 경제 생태계가 가능했다고 프리드먼은 이야기한다. 이 일화에서 프리드먼은 화폐와 화폐 경제의 근간은 그 구성원들의 신뢰임을 강조한다.
이후 이 책은 금·은본위제, 디플레이션, 복본위제(여러 종류의 금속을 가격의 기준이 되는 본위 화폐로 사용하는 화폐 제도), 루스벨트의 은 구매 사업, 칠레와 이스라엘의 환율 조치에 대한 비교 분석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플레이션이 왜 생기는지,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은 무엇인지, 인플레이션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Inflation is always and everywhere a monetary phenomenon).” 프리드먼이 1969년 런던 윈콧 기념 강연에서 했던 명언이다.
그는 인플레이션 관련 “너무 많은 돈이 너무 적은 물건을 좇고 있다”고 표현했다. 경제 전체 생산량은 고정돼 있는데 화폐 공급만 계속해서 늘어나면 물가는 상승한다. 개인 입장에서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경제 전체적으로 돈이 늘어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 말이 ‘화폐경제학’의 핵심이다.
그러면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는 생산량 증가보다 높은 수준의 화폐 공급 증가는 왜 일어날까? 프리드먼은 정부가 급격히 지출을 늘리거나 중앙은행이 잘못된 통화 정책을 펼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과 알코올 중독이 공통점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만 지속된다면 엄청난 부작용이 있는데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의미다.
인플레이션 발생 초기에는 돈이 더 많아지고 소비가 활성화되면서 모두가 부자가 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지속된다면 구매력은 떨어지고 경제 전체의 고통이 가중된다. 문제는 이미 돈을 더 찍어내 지출을 늘리는 데 중독된 정부와 경제 구성원들은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과 중독 모두 해결책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화폐 증가율 감소와 알코올 소비 감소다. 책의 8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개념적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를 훌륭한 스토리텔링 역량을 갖고 쉽게 풀어낸다. 프리드먼은 화폐 증가율 감소를 위한 조건으로 ‘중립’을 강조한다.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보장받고 재정 정책이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되면 안 된다는 것. 이와 동시에 독립성이 확보된 중앙은행이 경제에 과도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화폐 공급량을 경제성장률 등 거시경제 지표들을 기반으로 미리 정한 기준에 따라 매년 증가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준칙주의’다. 프리드먼은 준칙주의야말로 고통이 수반될 수는 있겠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중독을 끊어낼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프리드먼의 ‘화폐경제학’은 발간 후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특히나 1980년대 초인플레이션 시대를 경험하고 극복한 사람들에게 프리드먼의 주장은 합리적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등장으로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하는 시카고학파와 거시경제 변동에 화폐 공급량과 중앙은행 역할을 중시하는 통화주의는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정책 입안자 재량을 중시하는 케인스학파에 맞서 그런 불확실성을 최소화시키는 준칙(원칙)에 입각한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통화주의학파는 미국의 경제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화폐경제학’ 이후 경제학 안에서는 케인스학파와 시카고학파의 대결 구도가 성립될 정도로 경제학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시카고학파와 통화주의는 수세에 몰리는 듯 보였다. 시장 실패로 인한 전 지구적 스케일 금융위기를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극복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저금리 정책과 이로 인한 지나친 화폐 공급의 증가는 초인플레이션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인플레이션 원인과 해결책을 다룬 이 책은 40년 만에 초인플레이션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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