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쥐려던 日 비밀 계획…美도 두려워 했는데 [테크토크]

임주형 2024. 1. 6.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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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日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
획기적 병렬 컴퓨팅 개념 최초 제안
국내외로부터 외면 받아 결국 폐기돼
기술적 우월성 쫓다 범용성 놓친 패착

버블 경제를 겪기 수년 전인 1980년대 초 일본. 당시 일본은 정부 주도하에 조선업, 반도체, 통신기기, 화학, 철강 등 여러 전략 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서구 경제를 빠르게 따라잡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산업 전략을 이끌었던 브레인은 '통상산업성(경제산업성의 전신)'이었습니다. 통상성 관료들은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등 당시 선진국의 사례를 면밀히 분석해 주요 제조업 트렌드를 예측하고, 그보다 앞서 국내 제조업체들을 준비시킴으로써 시장을 선점했지요.

그런 통상성이 1982년, 미래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10개년 비밀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바로 '제5세대 컴퓨터(Fifth Generation Computer)'입니다.

日 관료들이 구상한 미래 반도체, 제5세대 컴퓨터

일본의 제5세대 컴퓨터 계획은 미국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5세대 컴퓨터'는 당시 통상성 관료들이 규정한 컴퓨터 반도체의 진화 단계를 뜻합니다. 1세대는 진공관 컴퓨터, 2세대는 트랜지스터, 3세대는 논리 회로를 집적한 반도체, 4세대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동할 수 있는 프로세서, CPU(중앙처리유닛)였죠.

1980년대 시점에서 통상성이 예측한 4세대 이후, 즉 5세대 컴퓨터의 핵심 기술은 '병렬 컴퓨터'였습니다. 컴퓨터 여러 대를 병렬로 연결해 처리 능력을 높여, 전산 장치의 능력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었지요.

통상성은 즉각 일본 최초, 동시에 세계 최초의 5세대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반도체 기업 소속 수천명의 연구원이 해당 프로젝트에 합류했습니다.

일본의 5세대 컴퓨터 개발 계획에 관한 소문은 다른 국가로도 퍼졌습니다. 특히 일본에 경제적 우위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던 미국의 반응은 격렬했습니다. 결국 미 정부는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연구소를 텍사스주에 세우는가 하면, 미 국방성에선 차세대 반도체를 탑재한 지능형 전차 개발 프로젝트를 수립하기까지 합니다.

10년간 수천억 쏟아부었는데...결국 국내외서 외면

제5세대 컴퓨터 1호기 '패러랠인퍼런스머신'(PIM) [이미지출처=컴퓨터 뮤지엄 홈페이지]

그렇다면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일본의 5세대 컴퓨터는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까요. 오늘날 이 프로젝트는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지요. 실제로, 5세대 컴퓨터는 결국 참혹한 실패로 끝을 맺었습니다.

실제 컴퓨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습니다. 1988년엔 '제5세대 컴퓨터 1호기'라는 이름으로 첫 컴퓨터가 공개됐으며, 1991년 상용화한다는 구체적 로드맵도 수립됐습니다. 통상성은 해당 컴퓨터를 여러 산업 영역에 이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막상 제품이 나오자 해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외면받았습니다. 통상성이 직접 나서 소프트웨어를 무료 배포하기까지 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10년간 4억달러(약 52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탕진한 끝에 일본 정부는 1992년 모든 예산 지원을 철회했습니다.

인텔이 1982년 출시한 80286 CPU. 제5세대 컴퓨터는 이 반도체에 밀려 영원히 빛을 볼 수 없었다. [이미지출처=이베이]

5세대 컴퓨터의 가장 큰 문제는 프로그래밍이었습니다. 1980년대의 컴퓨터 기술력으로 수백, 수천대에 달하는 프로세서를 동시에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설령 그런 프로그램을 완성했다고 한들, 엔지니어들은 그렇게 다루기 어려운 제품을 굳이 나서서 배우려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1980년대의 반도체 산업은 통상성의 예측과 정반대로 발전했습니다. 통상성은 개별 CPU 성능의 한계 때문에 병렬로 연결한 컴퓨터의 시대가 올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개별 CPU의 발전(일명 무어의 법칙)이 다른 컴퓨팅 방식을 압도했지요.

기술적 우월성 아닌 범용성이 성패의 척도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통상성이 제시한 5세대 컴퓨터 아이디어가 빛을 보게 된 건 지금, 2020년대입니다. 반도체 미세 공정의 한계로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높이기 어려워지면서 무어의 법칙이 끝났습니다.

이제 반도체 기업은 물론 IT 기업들도 병렬 컴퓨터를 필수로 여깁니다. 현대 데이터센터 내부에는 강력한 프로세서가 수천, 수만대씩 연결돼 있지요. 인공지능(AI)의 시대가 열리면서 병렬 컴퓨팅은 더욱더 중요해졌습니다. 수백개 이상의 코어를 배열한 그래픽처리유닛(GPU) 같은 병렬 프로세서가 IT 산업의 필수재로 여겨집니다.

NHN엔터테인먼트의 TCC 내 서버룸. 아이러니하게도 병렬 컴퓨터의 전성기는 201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됐다. [이미지출처=NHN엔터]

어떻게 보면 5세대 컴퓨터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에' 실패한 프로젝트일 수도 있습니다. 5세대 컴퓨터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후치 카즈히로는 훗날 "(프로젝트 전에) 우리는 너무 큰 목표를 세워 무모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지금은 그런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며 비판을 받는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지요.

5세대 컴퓨터의 실패는 반도체 산업, 나아가 IT 산업 전반의 성질을 보여줍니다. 제품의 성패를 가르는 건 기술적인 우월함이 아닌 '범용성'에 있다는 겁니다.

최대 1000대의 컴퓨터를 병렬 구동할 수 있었던 최초의 5세대 컴퓨터는 당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렸던 단 1장의 인텔 CPU도 꺾지 못했습니다. 5세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은 인텔 CPU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인텔 CPU는 엔지니어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미 익숙한 제품이었으니까요.

일본 통상성의 5세대 컴퓨터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닌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임을 보여준 교과서적인 사례로 남게 됐습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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