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목에 칼 겨눈 호족,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
[김종성 기자]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현종(김동준 분)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고려 건국 92년 만인 1010년에 발발한 고려와 거란족 요나라의 제2차 여요전쟁으로 일대 위기에 빠진 그는 거란군을 피해 지방 여기저기를 전전한다.
그런데 거란군을 피해 다니기도 바쁜 그는 또 다른 세력에도 주의를 해야 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지방 호족들의 살기등등한 기세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 요나라 군대와 호족들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중고가 지난 12월 30일 방영된 제14회 13분경에 나온 지채문 장군(한재영 분)의 한마디로 압축됐다.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현종 부부를 호위하며 개천가를 지나던 그는 의기소침해 보이는 현종을 돌아보며 "폐하, 용안이 너무 어두우시옵니다. 아무 걱정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위로했다.
그런 뒤 "거란놈들이든 호족놈들이든 폐하께 해를 끼치는 자들은 소신이 꼭 물리치겠사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거란놈들이든 호족놈들이든'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고려 군주가 경계해야 했던 양대 세력을 반영하는 발언이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뒤 낯선 일행이 말을 타고 나타나더니 현종 일행의 앞을 가로막는다. 임금 앞인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일부러 무례를 범하는 이 사람들은 "이 고을의 향리들이오"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뒤 껄껄 웃어댄다.
지채문이 "어서 폐하께 예를 갖추지 못할까!"라고 호통치는데도, 이들의 안하무인은 멈춰지지 않는다. 이들 중 하나는 도리어 "폐하는 제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옵니까?"라며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는 분에게 무슨 예를 표하란 말입니까?"라고 시비를 건다.
잠시 뒤 호족들이 거느린 그 지역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나 현종 일행을 위협하다가 제압당한다. 대규모로 움직이는 거란군과 달리 호족의 사병들은 소규모로 아무 데서나 나타날 수 있으니, 현종 입장에서는 '거란놈들'보다 '호족놈들'을 더 경계해야 할 판국이다.
▲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
ⓒ KBS |
위 장면은 상당히 과장되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잘 보여준다. 몽골의 간섭을 받는 13세기 후반 이전만 해도 고려 군주들이 황제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황제의 권위로도 지방 토호들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했던 것.
그 자신도 호족 출신이었던 태조 왕건은 호족연합의 힘으로 고려를 세웠다. 그는 제주 지역의 탐라를 제외하고 후백제와 신라를 멸망시켜 '부분적 통일'을 이룰 때도 이 연합에 의지했다. 그가 29명의 부인을 둔 것도 자신을 도운 호족들에 대한 맹약의 표시였다.
그로 인해 훗날 개경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해진 호족들의 기를 꺾어놓은 임금이 제4대 광종(재위 949~975)이다. 광종은 호족들의 지배하에 있는 노비들의 일부를 평민인 양인으로 전환시키는 노비안검법과 더불어, 호족 자제가 아닌 실력 있는 인재들을 중앙 관직으로 불러들이는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유학자 출신 관료로서 호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 최승로가 '시무 28조'라는 건의서에서 설명했듯이, 광종은 처음 7년간은 호족들에게 유리한 정치를 시행해 "정치와 교화가 맑고 투명"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광종은 집권 8년차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집권 10년차에 과거제를 시행하더니, 급기야 12년차인 960년부터 호족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불평분자들을 역모죄로 몰아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재야세력이 아닌 기득권층을 겨냥한 '공안정국'이 펼쳐졌다.
그 결과, 광종은 호족들의 힘을 누그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한적 성과였다. 광종이 억누른 것은 '중앙 정치에서' 호족들이 행사하던 힘이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행사하는 힘에 대해서는 제대로 손을 대지 못했다. 호족들의 목소리가 개경에서 덜 나오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지방 사회에서 잠잠해지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고려시대를 다룬 역사서들에 속군(屬郡)이나 속현(屬縣)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온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이나 현은 그렇게 불렸다. 그런 곳들은 지방관이 파견된 인근 지역에서 함께 관리했다. 그런 지역들이 많았던 것은 중앙정부의 재정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관을 파견하기 힘들 정도로 눈치 보이는 지역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질적으로 소왕국처럼 작동하는 지역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 한 장면. |
ⓒ KBS |
고려시대에는 국인들이 아니라 지방 호족들이 역사를 주도했다. 지방세력이 본거지를 기반으로 개경에도 진출해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양상이 이 시대에 두드러졌다. 막강한 지방세력이 지방과 중앙의 장벽을 뚫고 도읍에 진출하는 현상이 강해졌던 것이다. 지방과 중앙의 지역통합이 그만큼 진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낭만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함경도를 본거지로 하는 이성계가 조정이 있는 개경의 처소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다. 이성계가 함경도와 개경의 중간에 있는 황해도 곡산에서 두 번째 부인인 강씨(신덕왕후)를 만난 것은 '지방세력의 개경 진출'이라는 그 시대 정치현상의 산물이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는 30대 중반의 이성계가 곡산의 우물가에서 10대 중반인 강씨에게 물 한잔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성계는 버들잎 띄운 바가지를 받아들고는 버럭 화를 낸다. 어떻게 먹으라는 것이냐는 항변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됐다. 이성계가 곡산을 지나가다가 강씨를 만난 것은 집이 있는 함경도와 직장이 있는 개경을 오고갔기 때문이다.
지방세력이 지방과 중앙을 오가며 국정에 개입하는 모습은 조선시대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지방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며칠을 걸어 한양으로 상경하는 모습은 '국인'들이 더는 국정을 독점할 없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역사 발전은 '중앙집권의 확대'라는 현상도 낳았지만, 동시에 '지방세력의 중앙 진출 확대'라는 결과도 함께 낳았다.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호족들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중앙에 미치는 지방의 힘이 강했던 시절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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