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찬양가 제작 거절, 유신정권 탄압받은 록의 대부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장준환 기자]
역사 속 최초가 최고로 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록이라는 개념조차 전무했던 척박한 한국 영토에 씨앗을 손수 뿌리고, 그 작물을 우리만의 정서로 개량해 보급한 신중현이 거둔 업적을 '최초이자 최고'라 표현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이견을 가지기 어렵다. 그야말로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초기 로큰롤 양식과 더불어 블루스와 소울 같은 블랙뮤직의 유산, 하드 록과 사이키델릭 사운드 등 다양한 외래 문법을 가져와 시대 초월의 작품을 남겼다.
▲ 애드 훠(Add 4) < 비속의 女人 > 앨범커버 |
ⓒ LKL레코드 |
고물 라디오에서 접한 AFKN(주한미군방송)의 외국 대중음악 문법과 무대 위 보조 연주부터 차근차근 터득한 실전 경험은 훌륭한 양분이 되었다. 지미 헨드릭스를 닮은 주법과 그 기타 솜씨를 인정받아 미군 사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신중현은 조금씩 실력을 기반으로 혁신을 향한 열망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첫걸음은 국내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등장한 로큰롤 밴드이자 한국어 자작곡으로 전곡을 꾸린 '애드 훠(Add 4)'다. 물론 처음 보는 유형에 대중의 반응은 무심했지만 '비속의 여인', '내속을 태우는 구려' 등 세대 초월의 명곡이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
모방의 방식으로는 설득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조한 성적에도 굴하지 않고 록의 매력을 체화하기 위한 연구를 거듭한다. 마침내 그 '한국적 록'의 정수는 1973년 결성된 3인조 프로젝트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로 하여금 발현되기에 이른다. 독특한 작명부터 한국의 토속적인 색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산품은 경시하고 외제를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엉성하고 하찮은 것을 비유하는 데 자주 쓰이던 '엽전'이라는 단어를 자처해 우리 문화의 격을 높이겠다는 반항적 의지를 전면에 드러냈다.
▲ 신중현과 엽전들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앨범커버. |
ⓒ 지구레코드 |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의 의의는 사회가 직면한 대중음악의 빈약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 더 나아가 소수의 지식인만이 클래식을 즐기고 그 외에는 일본 엔카로부터 영향을 받은 트로트가 지배할 뿐인 세태에서 벗어나 문화 다양성을 더 활발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몸부림과도 같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주류에서 보기 힘든 실험을 과감히 담은 이유였다.
3년 전만 해도 포크의 대부 김민기가 <김민기 1집>(1971)으로 시대상에 대한 자신의 사색과 고민을 가감 없이 담아내 민중가요의 큰 획을 그었지만, 정부의 탄압과 금지곡 판정으로 대중음악 자립을 향한 기세가 한풀 꺾인 상황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통기타를 높이 드는 대신 생소한 일렉트릭 기타를 집어 들었다. 이는 김민기가 쏘아 올린 정신을 이어 받되 록이라는 문법을 구사하겠다는 선택이자, 그것이 일개 답습의 산물이 아닌 단일된 고유명사로써 깊이와 안정감을 구축하고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겠다는 의지였다.
▲ '미인'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1975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 <미인>의 포스터, 멤버들이 주연으로 출연했다. |
ⓒ 신프로덕션 |
무엇보다 서구의 하드 록에 국악의 스타일을 접목해 대중이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도록 각색을 거쳤다는 점이 유효했다. 분명 록의 골격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한 쉽고 각인적인 멜로디와 익숙한 음계가 등장한다.
메가 히트의 실마리는 여기 있었다. 1973년 발표된 신중현이 프로듀싱을 맡은 가수 김정미의 앨범 < Now >에서도 그 핵심을 엿볼 수 있는데, 작품은 발매 당시에는 큰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사이키델릭 포크 사운드 사이로 넘실거리는 특유의 나른하고도 지역적 정서가 입소문을 타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즉, 신중현이 그토록 골몰하고 추구했던 '고유성'이 음반의 특색이자 장점이 된 것이다.
외골수이자 이단아다운 성격은 여타 수록곡에서도 거침없이 등장한다. 점진적인 기타 리프를 꿈틀거리다 가파른 완급 조절을 가져와 재치를 부여한 '긴긴밤', 반대로 뒤집은 문장을 반복 재생해 으스스하고 주술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나는 너를 사랑해', 작중 일종의 대화 스킷을 삽입해 곡 분위기를 반전하는 '나는 몰라',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a'를 연상케 하는 7분가량의 대곡을 선보인 '떠오르는 태양' 등. '엽전들'이라는 자조적이면서도 모든 것이 용인 가능할 것만 같은 별명 아래 상상의 나래를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펼친다.
당시 오일쇼크로 인한 재정난과 비상업적인 실험적 스타일에 음반 제작사였던 지구 레코드는 우려를 표하며 드러머를 교체한 뒤 더욱 정제되고 대중적인 후속 작업물로 재발매할 것을 요구했다. 뮤지션 본인에게는 발현의 제약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색채가 다른 두 작품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이지한 기타 디스토션과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대두되는 초판과 정제미와 노련함이 살아 숨 쉬는 본작을 비교해 가며 들어보는 요소는 또 하나의 즐길거리다.
추후 박정희 정부의 찬양가 제작을 거절한 것을 계기로 도마 위에 오른 신중현은 결국 1975년 대마초 파동의 주동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어 가수 생활을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 놓이고 만다.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역시 저속함과 퇴폐를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아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발전의 구름판을 딛고 뻗어갈 일만 남았던 록 전설의 서막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곧바로 침체기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신중현이 보여주고자 했던 그 갈망과 선구적 의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씨앗을 남기며 문화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어느덧 기나긴 역사를 거치며 이제는 록 강국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만큼 뚜렷한 내실을 다진 한국의 대중음악이 아니던가. 그 배후에는 '최초이자 최고'가 된 사나이 신중현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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