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하지 않는 자세, 배우 이선균을 기억하는 법
[김성호 기자]
세계로 뻗쳐나가는 한류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작가들까지 더없이 잘 나가는 한국 영화계다. 어느 모로 보아도 전성기를 맞은 오늘이지만 영화계의 규모나 한 해 제작되는 작품의 면면을 보고 있자면 한 명의 배우가 제게 맞는 옷을 입는단 게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충분한 시나리오도, 배역도 부족한 상황에서 배우가 펼칠 수 있는 연기의 폭은 그리 넓다고 할 수가 없다. 배우가 다채로운 면을 드러낼 수 있는 복합적 캐릭터는 얼마 되지 않고, 그마저도 연령과 성별, 외모 등의 장벽에 가로막히기 일쑤다. 검증된 소수의 배우에게 수많은 시나리오가 쏟아지고, 대다수는 좋은 배역 하나를 만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킬링 로맨스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낯선 스타일, 새로운 배역... 도전하는 이들
이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도전과 변신을 멈추지 않는 몇몇 배우가 있다. 갈채를 받아 마땅한 이들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와 캐릭터에 고립되는 걸 거부하고 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을 거듭하여 시도한다. 새로운 시도가 대개 그러하듯 성공보다는 실패로 귀결될 때가 적지 않지만 때로는 한층 원숙해지는 계기를 갖게도 되는 것이다.
지난해 개봉한 <킬링 로맨스>는 한국영화계에서 만나기 어려운 색다른 작품이다. 정체불명의 동화를 표방한 액자식 구성으로, 그 설정이 마치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는 듯 환상적이다. 현실적인 이야기 가운데 동화적인 내용이 섞여 있고, 일상적인 드라마 속에서 다분히 극화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 킬링 로맨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톱스타 억압하는 못된 남편 암살작전
마치 만화 캐릭터를 보는 양 비현실적으로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조나단이다. 아내를 트로피와이프 취급하며 각종 행사에 끌고 다니지만 정작 필요한 애정을 주지는 않는 그다. 심지어는 제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라도 생기면 여래를 구석에 세워두고 수백 개의 귤을 힘껏 던지는 폭력까지 행사한다. 이쯤이면 이혼이라도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겠으나 여래는 제가 학대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실제 학대를 당하는 것보다도 두려워 감히 이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여래와 조나단의 집 맞은편에 살고 있는 대입 4수생 범우(공명 분)다. 여래의 팬클럽 여래바래의 오랜 회원이기도 한 그는 우연인 듯 운명처럼 제 앞에 나타난 여래가 남편에게 학대당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곤 충격에 빠진다. 그는 여래에게 다가서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겠다 제안하고, 그녀와 함께 조나단을 제거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 킬링 로맨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엄청난 악당
급기야 범우가 조나단의 마음에 들어 그에게 아낌을 받게 된 나머지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더는 유지할 수 없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남몰래 조나단을 제거하려던 여래의 계획은 마침내 틀어지고 영영 조나단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차오른다.
<킬링 로맨스>의 주인공은 이하늬가 연기한 여래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누가 뭐래도 이선균이 맡은 조나단이다. 영화 전반을 장악하는 악당으로 온갖 방법으로 제 아내를 학대하면서도 한 편으론 이런 호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마성의 캐릭터다. 한국영화에서 그와 유사한 캐릭터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인물인데, 다분히 극화된 캐릭터인 탓에 자칫 잘못하면 개연성 없고 황당한 인물로 오인될 여지가 충분하다.
▲ 킬링 로맨스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끝없이 도전하는 자세, 그가 누구인지를 말한다
이선균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유사한 캐릭터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특별한 캐릭터가 바로 조나단이다. 다분히 특별하여 낯설 밖에 없는 이 인물을 이선균은 제게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유쾌하게 표현해낸다. 악당이지만 흥미롭고 낯설지만 어딘지 정이 가는 다채로운 캐릭터로 그 매력을 충실히 살려낸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기생충>과 <나의 아저씨>로 깊이 있는 정극 연기를 보인 그가 다음 행보로 이처럼 가볍고 유쾌한 역할을 골랐단 점이다. 수많은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상업적 성공이 담보된 영화, 혹은 안정적으로 제 연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 대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형식의 영화와 캐릭터를 선택했단 사실이 이선균이 어떤 배우인지를, 또 그가 영화를 어떠한 자세로 대해왔는지를 증명한다.
익숙함보단 새로움을, 안주보다는 도전을 선택하는 배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한국 영화계가, 그리고 한국의 관객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아프게 드러낸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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