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살아남아 에도 막부 공격도 버텨낸 시마즈(下)

이종길 2024. 1.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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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구행렬 따라 아산까지 올라온 진린, 묫자리도
오사카성에서 비극적 최후 맞은 도요토미 아들
시마즈 가문, 에도 막부 타도하고 정한론 펼쳐
유럽인들 亞 해상 영웅으로 단연 이순신 꼽아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에 이어

*이순신의 전사 소식에 고금도를 비롯한 인근 완도의 여러 섬 주민들은 대성통곡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근방의 강진, 해남, 진도 주민들까지 하늘을 원망하며 울었다. 진린 역시 땅바닥을 뒹굴며 곡을 했다.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순신의 영구는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고금도에 묻혔다. 남도 백성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입에 고기를 대지 않았다. 시신은 20여 일 뒤 가족이 있는 아산으로 옮겨졌다. 완도의 고금도에서 아산에 이르기까지 운구 행렬이 움직이는 곳마다 백성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수많은 백성이 수레를 붙잡고 울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류성룡은 국보 132호인 '징비록'에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날아온 적탄을 가슴에 맞았다. 좌우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장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순신은 가만히 입을 열어 '지금은 싸움이 심히 급한 때이니 아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본래 담략과 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말대로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싸움을 독려했으므로, 군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이완은 배를 몰아 헤쳐 들어가 구원했다. 진린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원할 줄로만 알고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몸을 땅에 던지면서 '나는 통제사가 와서 구원해 주었거니 여겼는데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웬 말인가?'라고 큰 소리로 통곡하니, 군중이 모두 소리를 내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바라 속에 곡성이 진동했다. (…)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의 영책에는 곡성이 끊이지 않아 마치 자신들의 어버이를 잃은 듯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물을 차려 따라나서며 울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시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라고 수레를 붙들고 우니, 길이 막혀 영구가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길에서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했다. 형개가 바닷가에 사당을 지어 충혼을 제가 지내자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의논해서 사당을 짓고 이를 '민충사'라 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장사꾼들과 어선들도 이곳을 왕래할 때마다 꼭 제사를 지내고 간다고 한다."

*이덕형은 '장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으니,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동정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순신의 운구 행렬을 따라 아산까지 올라온 진린은 이순신의 큰아들 이회를 만나 두 손을 붙잡고 울면서 위로했다. 진린은 조선 원정에 함께 따라온 지관 두사충에게 이순신의 묫자리를 당부했다. 유해는 두사충이 정해준 아산 금성산 아래 묻혔다. 하지만 15년 뒤 가족들에 의해 아산 어라산으로 이장됐다.

*역사 전문가 황현필 씨는 저서 '이순신의 바다'에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라고 기술했다.

*일본 교토에는 이총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베어 간 조선 군사와 백성의 코와 귀를 묻은 곳이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기록에 의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논란이라면 신체 어느 부위에 총을 맞았냐는 부분과 전사 직후 누가 기함을 지휘했는가의 내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손문옥이 아들 이회가 울지 못하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 북을 울리면서 나가 싸웠다(선조실록)." "순신이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순신의 조카 완이 싸움을 재촉하니 군중에서는 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날아오던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나갔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이 독려하였다(징비록)."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맞았다. 이순신이 매우 놀라 일어서는 찰나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 아들 회가 통곡하려 함으로 희립이 회의 입을 막고 통곡을 못 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의 갑옷과 투구를 벗기고 대신 기와 북을 잡고 독전하여 적을 몰아내었다(은봉야사별록)."

*진린의 '제이통제문'에는 이순신이 마치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 죽음 선택하지 않았나 싶어지는 문장이 있다. "평시에 사람을 대하면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 와선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를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어허 통제여!" 훗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류형도 생전에 이순신이 했던 말을 기록했다.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숙종 때 대제학까지 지낸 이민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을 떠났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숙종 때 영의정 이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얼마든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큰 공이 용납되기 어려움을 알고 드디어 싸움터에 이르러서 그 몸을 죽였다고 했다. 장군의 죽음은 미리 결정된 것이다. 오호, 슬프도다."

*조명연합군이 일본 연합 함대와 노량 바다에서 뒤엉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몰래 도망을 쳤다. 자신을 구해주러 온 아군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로 인해 고니시는 훗날 일본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휘하 장수들조차 실망했을 정도니 그를 따르는 세력의 이탈이 상당했다.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된통 걸린 시마즈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한창이었다. 서군에는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를 받들었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가세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한 동군은 이들을 물리쳤고 에도 막부를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데요시는 첫아들이 죽은 뒤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후계자로 임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쓰구를 할복시켜 제거한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에게 아들 히데요시를 후원해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히데요리에게 오사카 일부 지역만을 할양했다.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불만을 느낀 도쿠가와 막부 측은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을 동원해 전쟁의 명분을 만든 뒤 1614년 겨울과 이듬해 여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결국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기미와 함께 자살했다. 비극적 최후를 아쉬워한 오사카 사람들은 사나다 유키무라 등 도요토미 측 장군들이 막부 군에 계속 저항했다거나 히데요리가 죽지 않고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 규슈 가고시마로 탈출했다는 등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니시와 시마즈군의 세력 약화였다. 가장 용맹하다는 시마즈군은 병력 가운데 겨우 2000명만 가담할 정도로 역할이 미미했다. 이순신과 노량에서 격돌하며 엄청난 병력이 손실됐으니 도리가 없었다. 소수의 시마즈군 병력이 다수의 동군을 돌파해 자신들의 근거지인 규슈 서남부의 사쓰마번까지 후퇴한 퇴각은 지금도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다뤄진다. 에도 막부가 시마즈를 끝까지 공격했으나 시마즈는 끝내 버텨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의 17대 적자다. 1585년까지 규슈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듬해 규슈를 공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 1600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연합해서 거병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간신히 탈출했다. 시마즈 가신단 300명은 적진 한가운데를 가르며 혈투를 벌인 끝에 여든 명이 살아남아 퇴각함으로써 도쿠가와 군으로부터 주군 요시히로를 지켜냈다. 이 사례는 전투에서 후퇴할 때의 전술이 중요하다는 설명을 할 때 종종 인용된다.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당시 반침략 세력이었음을 내세우며 조선과 통상을 원했다. 조선은 에도 막부가 원할 때 통신사를 파견했고, 광해군은 기유약조(1609)를 체결해줬다.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의 통교를 허락했다.

*노량해전에 참여했던 소 요시토시는 소 가문의 20대 쓰시마 번주이다. 1587년 규슈를 공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영에 찾아가 쓰시마 지배를 확인받고 조선과의 교섭을 명받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가톨릭 다이묘가 됐다. 임진왜란 발발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전쟁 중에는 조선과의 교류 경험을 살려 일본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한 뒤에는 그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에 전념했다. 그런데 이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 가운데 누가 먼저 국서를 보낼 것인지를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시마 번은 조선 측이 먼저 국교 재개를 청해왔다고 막부에 전해 국서를 받은 뒤 몇몇 구절을 바꿔 마치 막부 측이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처럼 위조해 조선에 보냈다. 조선 측은 이 서한의 내용과 형식에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회답서를 일본에 파견했다. 쓰시마 번은 이번에는 조선 측이 먼저 국교 정상화에 적극적인 것처럼 조선의 국서를 위조했다. 일련의 과정은 소 요시토시 사후에 소 사문과 신하인 야나가와 가문 간에 다툼이 벌어지면서 1635년 막부에 발각됐다.

*훗날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번은 조슈번과 연계해 에도 막부를 타도했다. 메이지 유신을 끌어내었고, 정한론(한반도 정벌과 대륙 진출)의 선두주자가 돼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했다. 지금도 이들은 일본에서 가장 극우적 성향을 보인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면서 재정적 곤란을 겪었다. 명나라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던 만력제(명나라 신종)는 자기 재산을 조선에 희사했다. 그 덕에 많은 조선인은 굶주림을 면했다. 조선은 송시열의 주도로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에 만동묘(만력제의 가묘)를 세우고 그를 추모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이에 대한 분노를 기억하고 있다가 문화대혁명 때 무덤을 파헤쳐버렸다.

*조선에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해 이순신과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서울대 특강에서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고,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은 오늘까지도 한국에 살고 있다"면서 정유재란 당시의 한중 역사를 거론한 바 있다.

*1705년경 승려 세이키가 펴낸 '조선군기대전'과 작가 바바신이 간행한 '조선태평기'는 17세기 후기 일본에 유입된 '징비록'을 이용해 '다이코기' 등 일본 문헌 및 '양조평양록', '무비지' 등 명 측 문헌에 실린 조선 관련 기사를 대폭 수정했다.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가 노량해전 기사이다. '징비록'이 유입되기 이전에는 '양조평양록' 기사가 노량해전에 관한 일본 측 문헌의 주요 출처였는데, 여기서 중심인물은 명의 제독 진린이었으며 이순신은 '조선 이통제'라 불리는 익명의 엑스트라로 등장할 뿐이었다. '양조평양록'의 다른 곳에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보이기는 하지만 '양조평양록' 안에서 이순신과 조선 이통제는 동일 인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조선군기대전', '조선태평기'에서는 '조선 이통제'라는 호칭이 '조선 통제 이순신'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지금 싸움이 급하니 너희들이 삼가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그의 장렬한 죽음과 '나는 순신이 살아서 나의 위기를 구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이러한 용사를 잃었는가'라는 진린의 탄식이 소개될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영웅다운 일생이 대서특필되기에 이른다.

*'조선군기대전', '조선태평기'의 노량해전 기사를 계승한 '에혼다이코기'는 진린이 위기에 빠질 것을 예측한 이순신이 '어리석도다, 진린. 목전에서 패배해 퇴로조차 찾지 못할 것이다. 기습 부대를 보내서 군대를 구해야겠다'라며 구원군을 보냈기에 진린이 이끄는 명군이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순신의 지혜에 왜병이 물러났다'고 해서 그의 지략을 강조한다. 요컨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오면서 명의 진린과 조선의 이순신의 위상이 역전된 것이다.

*해군력에 관심이 많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해상 영웅으로 단연 이순신을 꼽는다. 1900년대 초 영국 외교관이자 동아시아 전문가인 조셉 헨리 롱포드는 이순신에 대해 "해양 국가에서 해양 전력의 영향력, 나라를 구원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더 두드러진 역사적 사례는 없다"고 평가했다. 이언 바우어스 노르웨이 국방연구소 교수는 2017년 4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 학술 세미나 '세계 속의 이순신'에서 영국 군사학자 밸러드의 저서 등을 인용해 "영국인들은 넬슨의 업적을 다른 인물과 비교하기를 꺼리지만, 해전에서 패한 적이 없고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한 이순신은 넬슨과 비교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석한 이노우에 야스시 일본 방위대 교수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의 승리가 '넬슨한테는 비교될 수 있어도 이순신한테는 비교될 수 없다'고 말했다"라며 이순신을 한 수 위로 쳤다.

참고 자료 : 황현필 지음·발행처 역바연 '이순신의 바다(2021)', 류성룡 지음·이민수 번역·발행처 을유문화사 '징비록(2014)', 이순신 지음·노승석 번역·발행처 여해 '쉽게 보는 난중일기(2022)', 이순신역사연구회 지음·발행처 비봉출판사 '이순신과 임진왜란 4(2006)', 안영배 지음·박영철 사진·발행처 동아일보사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018)',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지음·김해경 번역·발행처 가갸날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2019)', 김시덕 지음·발행처 학고재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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