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사랑하지 않는 젊은이들

양민철,산업1부 2024. 1. 6.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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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철 산업1부 기자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 결심을 글로 적어본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사용했다는 만다라트 계획표를 꺼내 들었다. 만다라트는 최우선 핵심 목표 1가지를 적고 이와 관련된 8가지 세부 목표를 세우는 계획 방식이다. 각각의 세부 목표에 따른 하위 목표 8가지도 적는다. 그러면 총 64개의 실천 목표가 생기는데, 육아 재테크 인간관계 건강관리 등을 깨알같이 나열해도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아마 내용을 다 적기 전에 조만간 제풀에 포기할 것 같다.

계획표 완성과 별개로 꼭 지키고 싶은 목표는 하나 있다. 바로 쓸데없는 말 안 하기다. 구체적으로는 “연애 안 하니?” “빨리 결혼해라” “아이는 언제 가질 생각이야?” 등이다. 지난 한 해 만난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정말 많이 했다. 사랑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육아 같은 단어 없이는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많이 했다. 주로 결혼 적령기 지인들과 임신 출산 고민을 나누다 나온 단어들이지만 대화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과도했다. 심각한 저출산에 국가 소멸 위기론이 매일같이 울려 퍼지는 시대지만 편한 지인들과의 대화만큼은 결혼 출산 육아 지분을 줄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계기가 된 것은 최근 90년대생 어느 후배와의 대화였다. 그날도 집요하게 나는 ‘여자친구는 안 만나느냐’ ‘빨리 결혼해라’는 식의 추궁을 반복했다. 외모도 조건도 번듯한 후배였다. 제 딴에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잔소리를 한참 들어주던 후배는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이나 연애라는 감정이 뭐랄까요, 저는 불편해요.”

아니, 사랑이 불편하다니. 그리고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연애를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쏟아지는 반문에 후배는 재차 부연설명을 했다. “이성을 만나고 인간적 관계를 갖는 것은 좋지만 사귄다는 타이틀이 씌워진 이후 뒤따르는 감정의 변화가 소모적이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불편하다니, 좋으면 사귀는 것 아닌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면 행복하지 불편할 게 뭐라고…. 앞에선 이해할 수 없다며 투덜댔지만 그가 말한 ‘연애의 불편함’이란 감정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일본 드라마 작가인 요시다 에리카가 2022년 발표한 소설과 동명의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에는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 두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커리어와 사회생활 측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그래서인지 더욱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주변의 “연애 안 하니, 결혼 안 하니” 충고 세례에 괴로워한다. 특히 여주인공은 일찍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여동생과 늘 비교되는 삶을 살았다. 연애도 몇 번 해 봤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해 가정까지 꾸리는 일반적 코스와 자신은 맞지 않는다는 점만 느꼈을 뿐이다.

사랑과 연애에 관심 없는 두 사람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자신이 일반적인 연애 감정을 품지 않는 ‘에이로맨스’ 성향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연애 감정은 품지 않지만 혼자 있는 것은 싫은 두 남녀가 같이 동거 생활을 시작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말 그대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 끝까지 두 사람이 가치관을 바꿔 서로 사랑에 빠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사랑을 결혼의 전제조건이라는 등식으로만 보면 최근 한국의 혼인율은 사랑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꽤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계청 인구동태 조사에 따르면 40대에 들어선 1983년생 10명 중 3명(29.0%)이 미혼이다. 30대 중반을 넘긴 1988년생도 절반(49.2%)이 결혼하지 않았다. 미혼 상태인 이들이 연애 중이든 아니든, 사랑에서 출발해 연애와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세간의 공식은 현실에서 꽤나 작동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 글이 실릴 때면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한다. 아내는 요즘 길을 걷다가도 불룩 나온 배를 보며 “힘내세요” “파이팅” “축하해요” 등의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저출산 공포가 날로 퍼지며 아이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소위 애국 행위라는 시선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산율 반등이나 남들처럼 살기 위해 연애 결혼 육아를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출산 담론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시대일수록 올 한 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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