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기꺼이 먼저 연결되기
와인 페어링의 원리를 배우면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들, 예를 들면 약과나 불닭볶음면 같은 음식과 와인의 어울림을 찾아보는 수업은 반응이 좋았다. 와인의 종류나 역사, 즐기는 방법을 알면서 느끼는 지적인 충만함만큼 다양한 연령대와 경력을 가진 여성들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은 매달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배움의 영역이 와인뿐 아니라 요가, 발레, 목공처럼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매달 와인을 마시는 모임으로 살짝 변경됐지만. 새해가 100일 남은 시점엔 이 100일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등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마지막 모임에선 2023년의 세 장면을 꼽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혼자서는 안 할 일을 같이 모여서 해보는 것, 이렇게 모임의 본질을 유지하고 있다.
모임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와인 공부만큼 중요해진 것이 서로 안부를 묻고, 일터 근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적게는 여덟 명에서 많게는 열두 명까지 일하는 여성들이 주기적으로 만나다 보니 입사와 퇴사, 승진과 폐업 같은 대소사가 매달 우리에게 일어났다. 축하할 일은 같이 축하하고, 어려운 일은 함께 머리를 모으기도 했다. 일터에서의 부침과 괴로움에 대해 누군가 얘기하면, 그게 당장 내 일이 아닐지라도 언젠가 내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요즘 내 고민은…”이라고 말을 꺼내면 모인 친구들의 ‘걱정의 미간’을 보게 되는데, 어쩐지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걱정의 미간은 곧 각자의 경험이 깃든 솔루션 도출 시간으로 넘어가는데, 그 시간 덕분에 회사에서 좀 더 든든하게 일할 수 있었다.
최근 가고 싶은 회사에 역으로 포지션을 제안해서 입사에 성공한 친구가 그 과정을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들으며 짜릿했다. 친구가 직접 헤쳐나간 길이 앞으로는 그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게 가능하구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를 함께 알게 된 경험은 각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일이 가능한 쪽으로 걸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어쩌면 아무런 레퍼런스 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할 때도(물론 막막하겠지만) 이게 누군가에게 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좀 더 용기 낼 수 있지 않을까.
2024년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 봤다. 언제부턴가 바라는 것이 거창하거나 아주 많지 않은 연말과 연초를 보내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친구들에게 든든한 일터 밖 동료가 돼주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상황은 어렵고, 우리 일터도 호락호락하진 않으리라. 동료들과 힘을 내기 위해 일터 밖 동료들의 지혜와 마음을 빌리는 것, 나 역시도 든든한 일터 밖 동료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심각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준비하고, 같이 하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얘기 나누기.
바람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줄, 느슨한 연결이 생겼으면 좋겠다. 책 모임이든, 플로깅이든, SNS에서 만난 사람과의 모임이든, 뭐든 상관없다. 없으면 내가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런 연결이 일어나길 기다릴지도 모르니까. 마음으로 내 일터의 반경을, 동료를, 삶의 지지대를 넓히는 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2024년이 되길.
홍진아
카카오 임팩트 사업팀장이자 프로N잡러.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 등의 책을 썼고, 밀레니얼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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