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님, '존 F. 케네디 인용' 자제해 주십시오

안홍기 2024. 1. 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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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R&D예산 확대 말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는 사람" 강조...실제 맥락은 평화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안홍기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5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에서 박수치고 있다. 2024.1.5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종종 거론한다. 이번엔 연구개발을 독려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을 인용했다. 하지만 본래 취지와는 다른, 잘못된 인용이다. 

윤 대통령은 5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제 임기 중에 R&D 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R&D는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라면서 "이제 예산 문제는 정부에 맡겨 놓으시고 여러분은 세계 최고를 향해 마음껏 도전하시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라고 인용하면서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도전이 우리나라를 도약시키는 힘입니다.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실 수 있도록 저와 정부가 온 힘을 다해 뒷받침하겠다"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날 발언에서도 AI(인공지능), 첨단바이오, 퀀텀(양자)이라는 3대 분야와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R&D"라는 지원 기준이 제시됐다. '앞으로 늘릴 것'이라고는 했지만 당장은 지난해 31조 1000억 원이던 연구개발(R&D) 예산이 25조 9000억 원으로 크게 삭감된 상태다.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라"는 건 "임기 중에 R&D 예산을 대폭 확대"한 뒤에 할 수 있는 말이지,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이 당장 내놓을 말은 아니다.

케네디 발언의 맥락은 '평화'

윤 대통령이 동원한 명언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년 6월 28일 아일랜드 의회에서 한 연설의 한 대목에 나온다.
 
세상의 문제들은 회의론자나 냉소론자들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시야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없었던 것들을 꿈꾸면서 '왜 안 돼?(Why not?)'라고 묻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계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가 작은 나라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 미국 시민의 말을 빌려서 말해 보자면, '정의로운 대의의 갑옷을 입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미소한 나라일지라도 오류의 모든 무리들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케네디가 꿈꾸자고 한 '전에는 없었던 것들'은 바로 평화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케네디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경쟁이 아니라 평화 경쟁을 해야 한다는 '평화 연설'(1963년 6월 10일 아메리칸대학 졸업식)을 내놨다. 그는 소련과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BT)을 체결하기에 앞서 동맹국들에 협상 내용을 설명하고 평화 캠페인을 펼치기 위해 유럽을 순방했는데, 이 아일랜드 의회 연설 역시 이 평화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존 F 케네디의 위대한 협상>을 쓴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5년부터 '평화 연설'이 나온 1963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은 소련이 저지른 죄악을 열거한 다음, 미국은 전혀 잘못이나 이탈을 한 적이 없는 선의의 국가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와 다른 주장을 편다. 그는 소련을 비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설문에도 나와 있듯이, '논쟁의 득점을 쌓아 올리기 위해 논쟁을 하고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그보다는 미국 국민들에게 소련도 미국처럼 평화에 관심이 있고, 또 평화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데 주력했다.

윤 대통령은 종종 달 탐사선을 발사한 '문샷 프로젝트', '정신보건을 위한 행동' 보고서에 기초한 정신보건정책 등을 언급하는 등 존 F. 케네디의 정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지난해 윤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미국 존 F. 케네디 재단으로부터 '용기 있는 사람들 상'도 받았다. 하지만 케네디가 꿈꾼 평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로지 '힘에 의한 평화'만 외친다.  
  
▲ 북한 해안포 사격 뉴스 시청하는 시민들 북한의 해안포 사격으로 서해 최북단 백령도와 연평도에 주민 대피령이 내려진 5일 오후 인천 중구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전술핵잠수함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 핵무력 사용을 헌법에 싣고, 한국은 그에 맞서 미국의 전략핵폭격기를 불러들이고 3축 체계 구축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남북은 9·19 군사분야 남북합의서를 사실상 사문화하고 전력을 휴전선 가까이 끌어왔다.

남북 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것도 모자랐는지, 국방부는 정신전력교재에 '내부의 적'을 명시했고, 윤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과의 싸움을 예고했다. 직후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시민의 칼을 맞았다.

윤 대통령에게 케네디와 같은 지도자가 되어서 평화를 위한 용기를 내달라고 쓰려니 기자 스스로 무안함을 느낀다.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막무가내로 존 F. 케네디를 갖다 붙이는 일은 자제해 달라는 정도의 부탁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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