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말폭탄 닷새 만에 실제 포격…군 "이상 징후 포착했다"

이근평 2024. 1. 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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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해 백령도와 연평도 부근 북방한계 수역(NLL) 에 대한 기습적인 해안포 도발은 한반도 긴장 고조를 위한 북한의 도발이 '말 폭탄'수준에서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이 이날 도발로 포문을 연 뒤 그 수위를 점차 높여가며 한·미를 압박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쟁과 평화 중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는 낡은 대남 심리전 수법을 다시 꺼내든 것이기도 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노동신문=뉴스1


군 관계자는 이날 “북한의 포병 사격이 실시되기 전 이미 이상 징후가 포착돼 이날 오전 감시태세를 격상한 뒤 만에 하나 벌어질 무력충돌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군 내부에선 북한의 이번 도발을 예견된 수순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쏟아낸 일련의 도발적 발언은 예고편 성격이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31일 북한군 주요 지휘관을 소집해 “적들의 무모한 도발 책동으로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당 전원회의가 우리 혁명무력 앞에 제시한 전투적 과업들을 철저히 집행ㆍ관철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같은 달 26~3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선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했다. 남북관계를 “전쟁 중인 두 교전국가 관계”로 규정하며 김정은이 직접 ‘영토 완정(完整)’ 의지를 피력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해 한·미의 주요 선거를 앞두고 한반도 긴장 수위를 끌어올려 '몸값 높이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내부를 결속시키는 차원에서도 북한이 '준비된 도발'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결국 "무력충돌을 기정사실화 하라"는 김정은 발언 뒤 닷새만에 도발이 현실화된 모양새인데, 북한 역시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첫 도발 수위를 조절했다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김영희 디자이너


이날 북한 포병 사격 탄착 지점이 대부분 서해 NLL 이북이었고, 장사정포와 비교할 때 사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해안포가 주로 동원됐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상황 관리가 가능한 수준의 도발로 시작했지만, 군 관계자는 “이날 도발을 시작으로 저강도에서 고강도로 서서히 도발 수위를 높여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날 도발 뒤 입장을 내고 사격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완충구역을 겨냥했다는 우리 군 발표에 대해서는 "여론을 오도하기 위한 완전한 억지주장"이라며 "대피와 대응사격놀음을 벌린 것 역시 우리 군대의 훈련에 정세 격화의 책임을 들씌우려는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반발했다.

또 "해상실탄사격방향은 백령도와 연평도에 간접적인 영향도 주지 않는다"고 했다. 군 관계자는 이를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일축했다.

북한은 이번 도발이 "대규모적인 포사격 및 기동훈련을 벌려놓은 대한민국 군부깡패들의 군사행동에 대한 우리 군대의 당연한 대응행동조치"라고도 주장했다. 새해 들어 육군이 전방에서 포사격 훈련을, 해군이 동·서·남해 전역에서 해상기동훈련을 펼친 가운데 한·미 연합전투사격훈련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 것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북한은 도발할 때마다 이를 자위적·당위적 조치로 주장해왔으나. 총참모부까지 나서 이처럼 위협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식으로 구구절절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라는 지적이다. 도발 수위를 조절하며 한국의 대응을 떠본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이는 행태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적들이 소위 대응이라는 구실밑에 도발로 될수 있는 행동을 감행할 경우 우리 군대는 전례없는 수준의 강력한 대응을 보여줄 것"이라며 "민족, 동족이라는 개념은 이미 우리의 인식에서 삭제되였다"고 했다.

북한으로선 한국의 총선과 미국의 대선 일정 등 정치적 스케줄을 활용해 국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갈 필요가 있다. 특히 대북 문제를 바라보는 윤석열 정부와 야당의 시각차가 전례 없이 뚜렷한 상황에서 도발을 통한 남·남 갈등 유발로 총선을 앞둔 한국 사회를 흔들어 댈 수도 있다.

전쟁 위협을 고조시켜 평화의 가치를 부각하려는 속셈이다. 이번 도발에서 9·19 남북군사합의에서 합의했던 완충지대를 표적으로 한 것도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11월 북한의 정찰위성 도발에 맞서 9·19 합의를 먼저 일부 효력정지한 데 대한 정당한 대응처럼 포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합참이 도발 직후 “이번 위기 상황의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강조한 것 역시 이런 의도를 간파한 데 따른 것이다.

이성준 합동참모본부 공보실장이 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북한의 연평도·백령도 북방 해안포 사격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e브리핑 캡처=연합뉴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정은 주도로 지난 연말 총화기간을 거치면서 군사 도발과 관련한 시나리오가 완성됐을 것”이라며 “서해 5도는 물론 군사분계선(MDL)과 공중까지 도발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이 지난해 말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육로와 육로 인근 감시초소(GP) 일대에 지뢰를 매설하고 9·19 군사합의에 따라 철거한 GP를 복원한 사실이 이날 확인됐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도 “이번 사격은 김정은이 연말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전쟁 중인 적대 국가’로 재정의한 뒤 나온 군사적 후속조치 성격”이라며 “앞으로 전방 지역의 국지 도발과 사이버 테러와 같은 도발이 잦아질 것이란 의미로도 풀이된다”고 내다봤다.

정영교·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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