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이 말하지 않는 전쟁 이야기

윤일희 2024. 1. 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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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김한민 감독, 2023)

[윤일희 기자]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노량>을 보다 딸애가 흑흑대는 걸 보니 이순신 시리즈 영화의 사명은 무난히 완수된 듯하다. 나는 이순신의 호국보다는 실감 나는 해전 신에 이 영화의 방점을 찍었기에, 이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았다. 해전 신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적군이고 아군이고 간에 너무 많은 살상이 있어 처참했다. 참혹의 한복판에 이순신도 죽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싸움이 급하다"라고 부관들을 재촉했다.

얼마 전 <서울의 봄>을 보고 이어 <노량>을 보았다. 완벽히 남자들의 영화라 여자들은 없었다. <서울의 봄>에선 이태신의 부인이 다정하게, <노량>에서는 이순신의 부인이 쌀쌀맞게 잠깐 등장한다. 조금 다른 정서일지라도, 이들 부인들은 남편의 무운을 빌며 가정을 지키는 고결한 여성들을 재현한다. 한국과 동아시아를 연구한 역사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의 언급처럼, 여성의 정절은 부부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관련한 공적 문제였다.

가부장이자 무장인 이순신(김윤석)은 효심 지극한 아들이자 아들들을 아끼는 아버지이다. 이에 부인(문정희)은 짱짱한 절개로 가부장의 완성을 사회적으로 증빙한다. 가족은 사적이고 군대는 공적인 영역이라지만, 남성은 구별하지 않는다. 사와 공을 교묘히 혼재시켜 결격 없는 가부장과 국가에 충성하는 무장을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가 공기처럼 스며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극적인 사의 찬미를 위해 아들들(부자의 정)을 동원한다. 이순신의 꿈으로 이미 삼남 면(여진구)의 죽음을 예고했고, 아들의 죽음에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버지의 고통이 절절하다. 면과 이순신의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절정은 노량 바다 위에서 격렬히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면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환영으로 나타나 귀신으로라도 나라를 지키고(충) 아버지를 조력한다는(효) 오래된 호국영령 신화로 치닫는다. 배가 포탄으로 난파되고 여기저기 살육의 고성과 신음들이 고막을 찢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아들의 환영을 보는 무장이라니... 왜적과 싸우다 죽은 아들이 이제 적을 끝장내고 죽을 아버지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환영으로 등장한 것은, 결국 전쟁이라는 역경에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 남자들의 본령이고 무사인 부자가 이를 숭고히 완결했음을 알리며 남자들의 전쟁 승리 신화를 굳건히 한다.

면을 통한 아버지다운 영웅성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그는 북 치는 장군이 된다. 병사들은 북소리만으로도 장군이 자신들을 독려하고 있다고 고무되어 마지막 힘을 쏟는다. 그러다 전투가 거의 끝나도록 죽지 않고 북을 치고 있는 이순신에 의아해하던 관객은 등을 보이며 북을 치고 있는 장수가 그의 큰아들 휘(안보현)인 것을 알아챈다. 아버지를 대신해 북을 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은 눈물겨운 부자의 정을 보임과 동시에 전쟁터에서 장수의 명을 받든 부장의 충성스러움을 환기시킨다. 이로써 이순신의 전쟁은 역사의 주체가 피를 승계한 부자이며 나아가 무신들인 남자들의 세계임을 공고히 한다.

이순신의 호국정신(무신다움)을 혈연뿐 아니라 외부의 목소리를 덧입혀 증명하기 위해 영화가 제시하는 인물은 준사(김성규)다. 그는 앞선 이순신 시리즈 <한산>에서 아군에 붙잡힌 왜군이지만, 이순신의 지도자 다움에 감화되어 귀화한다. <노량>에 재등장한 왜군 출신 준사가 목숨이 위태로운 임무를 맡아 이순신을 돕고 전사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조선의 후예인 한국인에게 민족주의를 꿈틀대게 한다.

그는 앞서 <한산>에서 이순신이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라는 말에 감화된다. 이는 전쟁하는 피아의 입장의 차이일 뿐이지만, 준사는 이 말에 깨달음을 얻고 이순신의 인물됨을 흠모하고 따르게 된다. 준사가 감화한 지점이 이순신의 지략이나 용맹함보다, 병사들을 아끼는 어버이다움에 있었다는 데서 다시 한번 영화는 이순신의 지도자다움과 어버이다움이 혼연일체임을 일관되게 제시한다. 자애로운 어버이와 좋은 지도자는 하나의 정체성인 남성성으로 수렴되며, 이는 역사의 주체가 남자들이고 역사의 역동이 남자다움(무인다움)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서울의 봄>에서 출정하는 이태신을 승인하듯 굽어보는 것이 이순신 동상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준사나 이순신의 두 아들의 존재나 역할은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다만 영화는 이순신다움을 전쟁만 잘하는 용장으로서가 아니라,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자애로운 어버이의 마음을 가진 아버지이자 지도자로 정체해 기록하고 싶어 한다.

<노량>과 <연인> 속 길채의 한마디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나는 이순신의 공적을 폄하할 마음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을 남성들(전쟁 영웅들)의 역사로만 기억하려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터의 남편을 걱정해 먼 길을 와 고작 남편의 탕약을 챙기고 떠나는 부인에게 이 전쟁은 무엇일까.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면 자결로 충정을 표해야 했을 여자들에게 전쟁과 그 승리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끝까지 쫓아 궤멸시키지 않으면 사사로운 원한만 쌓이게 한다는 이순신의 전투관이 허무하게도 임진왜란 후 전쟁은 다시 벌어졌다. 이번엔 왜군이 아니라 청군이 조선을 분탕질했다. 왜군과 싸운 지 채 반세기도 안 되어 청군이 침략했고, 이 난리엔 이순신이 없었다.

MBC 드라마 <연인>은 이 전쟁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로맨스물이지만, 전쟁을 통해 여자들이 겪는 역사를 다룬다. <노량>이 보인 전투하는 용맹한 군인들 대신, 한겨울 왕이 적군을 피해 숨은 남한산성에는 옷도 신발도 없이 굶주리며 겨울을 나야 하는 동사 직전의 가엾은 병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어버이처럼 돌볼 왕도 장수도 없다.

나라가 군신과 부부의 도리를 말하기 참담한 위기여도, 유생들은 여자가 정조를 지키고 신하가 절개를 다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 한가로이 외친다. 전쟁 중에 다치고 죽은 백성이 얼마일 것이며, 청군에게 능욕을 당한 여자는 얼마일 것인가. 드라마 주인공 길채의 말처럼, 전쟁 중 오랑캐에게 강간 당한 것은 여자들의 죄가 아니지만, 나라는 이를 죄라 징치하고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청에 포로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여자들에게 돌아갈 집 같은 것은 없었다. 이들은 '환향녀'라 불리며 손가락질 당하고 버려졌다. 길채는 '환향녀'가 여자들의 잘못도 죄도 아님을 선언하고 당당히 살아나가는 드문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길채의 살아갈 결심과 그가 보인 여성들에 대한 연대감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환향녀'가 전쟁과 남성중심사회가 배제하고 침묵시킨 역사적 존재였고, 그들을 지칭했던 말이 결국 성적 방종과 타락과 수치를 저지른 여자를 멸칭하는 '화냥년'으로 변질되어 낙인 찍은 것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노량>의 남성 전쟁 영웅 서사가 말하지 않는 전쟁의 역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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